위기가 닥치면 나라는 돈을 풀어요. 코로나 때 재난지원금이 그랬죠. 그런데 100년 전 대공황 때는 돈을 풀고 싶어도 풀 수가 없었어요. 정부의 손발을 묶은 게 다름 아닌 금이었거든요. 금은 어쩌다 구명줄이 아니라 족쇄가 됐을까요? 숫자는 흘려보내고, 이야기만 따라가 볼게요.
1929년 가을, 은행 앞에 늘어선 줄

4화에서 봤죠. 통장에 찍힌 숫자만큼의 현금이 은행 금고에 그대로 쌓여 있지는 않다는 것. 평소엔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아요.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한다면요? '내 돈, 지금 찾아둬야 하는 거 아니야?' 이 화는 그날 벌어진 일에서 시작해요.
지금으로부터 100년쯤 전인 서기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이 무너졌어요. 주식이 뭔지 몰라도 괜찮아요. 사람들이 재산을 넣어두던 큰 시장이 무너졌다는 것만 잡으면 돼요. 그 뒤로 3년 동안 값이 약 89% 떨어졌어요. 100만 원어치가 11만 원이 된 거예요.
더 무서운 건 그다음이었어요. 1929년부터 1933년 사이, 미국에서만 은행 약 9,000곳이 문을 닫았어요. 4년 내내 하루에 여섯 곳씩 사라진 셈이에요. 평생 모은 저축이 통장째로 사라진 사람이 수백만 명이었죠.
은행은 왜 무너졌을까요? 시장이 무너지자 빌린 돈을 못 갚는 사람과 회사가 쏟아졌고, 은행이 빌려준 돈이 물리기 시작했어요. 4화에서 은행의 비밀을 봤죠. 은행은 맡아둔 돈을 금고에 그대로 쌓아두지 않아요.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죠.
평소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맡긴 사람들이 같은 날 한꺼번에 찾으러 오지는 않으니까요. 은행은 '설마 다들 같은 날 오겠어?'라는 믿음 하나로 굴러가요.
그런데 "저 은행 위험하대"라는 소문이 돌자, 정말 모두가 같은 날 찾아왔어요. 금고에는 그만큼의 돈이 없었고요. 4화에서 본 뱅크런이에요. 그 아슬아슬한 약속이 이때 미국 전역에서 한꺼번에 깨진 거죠.
새벽부터 줄을 섰는데 내 앞에서 창구가 닫히는 장면을 상상해보세요. 통장에 적힌 숫자는 어제와 똑같아요. 그런데 손에 쥘 수 있는 돈은 없어요. 대공황은 그 감각에서 시작됐어요. 이 불을 꺼야 할 정부의 손에는 도구가 하나 있었어요. 금리예요.
금리는 경제의 액셀과 브레이크예요

금리는 돈을 빌릴 때 얹어서 내는 값이에요. 돈의 사용료죠.
뉴스에서 "기준금리를 올렸다"는 말이 나오면, 얼마 뒤 대출 이자 안내 문자의 숫자가 바뀌어요. 대출이 있는 집이라면 그 한 줄이 바로 통장에서 느껴지죠.
금리가 낮으면 빌리는 게 싸요. 그래서 사람들이 돈을 빌려 가게를 열고, 공장을 짓고, 물건을 사요. 세상에 돈이 돌기 시작하죠.
반대로 금리가 높으면 빌리기가 부담스러워요. 다들 지갑을 닫고, 벌이려던 일을 멈춰요.
그러니까 금리는 경제의 액셀과 브레이크인 셈이에요. 경기가 식으면 금리를 내려서 액셀을 밟고, 너무 뜨거우면 금리를 올려서 브레이크를 밟아요. 지금도 중앙은행이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이거예요.
대공황은 6화에서 본 금의 연결망을 타고 유럽까지 번져 있었어요. 누가 봐도 액셀을 힘껏 밟아야 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각국은 정반대로, 브레이크를 밟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액셀을 밟아야 할 때 브레이크를 밟다

범인은 금본위제였어요. 6화에서 본, 돈을 금에 묶어둔 그 규칙이요.
금에 묶여 있다는 건 금이 있는 만큼만 돈을 찍을 수 있다는 뜻이에요. 경기를 살리려고 돈을 더 풀고 싶어도, 금고 속 금이 늘지 않으면 방법이 없어요.
게다가 불안해진 사람들이 지폐를 들고 와서 "금으로 바꿔달라"고 몰려들었어요. 은행 창구 앞에서 벌어지던 뱅크런이, 이번엔 나라의 금고 앞에서 벌어진 거예요.
금이 계속 빠져나가면 약속 자체가 무너져요. 그래서 정부는 어떻게든 금을 붙잡아둬야 했어요. 그런데 그 거의 유일한 방법이 금리를 올리는 거였어요.
금리를 올리면 그 나라에 돈을 두는 게 이득이 되거든요. "금으로 바꿔서 빼가느니 그냥 두고 이자나 받자" 하게 만드는 거죠.
이자를 조금이라도 더 준다는 은행으로 예금을 옮기는 그 마음이, 나라 사이에서도 똑같이 작동하는 거예요.
문제는 그 대가였어요. 금리가 오르면 밖으로 나가려던 금만 멈추는 게 아니에요. 공장도, 가게도, 집을 사려던 사람도 돈을 빌릴 수 없게 돼요. 밖으로 나가는 금을 막으려다, 안에 있는 경제를 통째로 얼려버린 거예요.
6화에서 금본위제의 치명적인 약점이 "위기 때 손발이 묶인다"는 거라고 했죠. 그 약점이 현실이 된 순간이었어요.
먼저 손을 뗀 나라가 먼저 살아났어요

결국 나라들은 하나둘 금을 놓기 시작했어요.
서기 1931년 9월 : 영국 (곧이어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가 뒤따라요)
1931년 12월 : 일본
1933년 : 미국
1936년 9월 : 프랑스, 스위스 - 끝까지 버틴 나라들
그런데 여기 반전이 있어요. 금을 먼저 버린 나라가 먼저 살아났어요.
1931년에 손을 뗀 영국은 1930년대 중반에 이미 회복을 시작했어요. 금에서 풀려나니 돈을 풀 수도, 금리를 내릴 수도 있었으니까요.
반대로 마지막까지 금을 붙들었던 프랑스는 가장 오래, 가장 깊게 불황에 시달렸어요. 영국보다 5년을 더 버틴 대가였죠.
2020년 봄을 떠올려보세요. 코로나가 닥치자 각국 중앙은행은 며칠 만에 금리를 내리고 돈을 풀었어요. 왜 그렇게 빨리 움직였을까요? 늦게 움직인 쪽이 어떻게 되는지를 세계가 이미 한 번 비싸게 배웠기 때문이에요.
금이 뒷받침해야 진짜 돈이라는 믿음, 그 믿음을 오래 붙들고 있을수록 불황도 그만큼 오래갔어요. 버틴 순서가 그대로 회복이 늦은 순서였던 거예요.
금값을 바꾼 건 금이 아니라 정부였어요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은 특히 과감했어요. 서기 1933년 4월, 개인이 금을 가지고 있는 것 자체를 금지했어요. 집에 있는 금을 정부에 내다 팔라고 명령했죠. 정부 금고에 금을 그러모아야 그만큼 돈을 더 찍을 수 있었으니까요. 값은 1온스에 20.67달러였어요. 1온스는 30g쯤 되는 무게예요. 손가락에 끼는 금반지 몇 개 정도죠.
그리고 아홉 달쯤 뒤인 서기 1934년 1월, 정부는 금 1온스 값을 35달러로 올려버렸어요.
금 자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어요. 작년과 똑같은 금덩어리예요. 그런데 20.67달러이던 게 35달러가 됐어요. 몇 달 전 20.67달러를 받고 정부에 금을 넘긴 사람은, 그사이 그 금이 35달러짜리가 되는 걸 지켜봐야 했어요. 개인은 금을 다시 가질 수도 없었고요.
누가 바꿨을까요? 정부가요. 정부가 "이제부터 이 값"이라고 정한 거예요.
우리도 비슷한 걸 겪어요. 항공사가 마일리지 규정을 바꾸면, 내가 모은 마일리지 숫자는 그대로인데 갈 수 있는 거리는 줄어들죠. 포인트를 만든 쪽이 그 값을 정하니까요. 루스벨트가 한 일이 딱 그거였어요. 대상이 마일리지가 아니라 달러였을 뿐이죠.
1화에서 말했죠.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라고요. 약속이니까, 약속한 쪽이 마음먹으면 다시 쓸 수도 있어요. 대공황은 그 사실을 온 세상 앞에서 증명한 사건이었어요.
금 1온스가 20.67달러에서 35달러가 됐다는 건, 거꾸로 말하면 같은 금을 사는 데 달러가 더 든다는 뜻이에요. 달러의 값어치가 40% 남짓 깎인 거죠. 달러 값이 내려가면 똑같은 미국 물건도 외국 사람 눈에는 그만큼 싸 보여요. 그러니 해외에 더 많이 팔 수 있겠다는 계산이었죠.
그리고 여기서 1화의 이야기 하나가 뒤집혀요. 금이 수천 년 동안 돈의 왕이었던 건 '아무나 못 구한다'는 특징 덕분이었잖아요. 그런데 대공황에서는 바로 그게 발목을 잡았어요. 아무나 못 구한다는 건, 정부도 못 구한다는 뜻이었거든요. 가장 큰 장점이 가장 필요한 순간에 가장 큰 약점이 된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 화의 결말은 우리 통장에 실제로 찍힌 적이 있어요.
2008년 금융위기 때, 그리고 2020년 코로나 때,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은 어마어마한 돈을 풀었어요. 금리도 바닥까지 내렸고요. 우리가 받은 재난지원금도 그중 하나였죠. 1930년대였다면 상상도 못 할 일이에요. 그만큼의 금이 금고에 없었을 테니까요.
위기가 오면 정부가 돈을 풀 수 있다는 것. 그게 세계가 금본위제를 버리고 손에 넣은 거예요.
대신 내놓은 것도 있어요. 금이라는 족쇄를 풀었다는 건, 돈을 얼마나 찍을지가 이제 오직 사람의 판단에 달렸다는 뜻이거든요.
요즘 물가가 오르는 이야기의 출발점이 사실 여기예요. 우리가 편해진 대신 무엇을 내놓았는지는 앞으로 차차 보게 될 거예요.
다음 화에서는 이 폐허 위에 세워진 새 질서를 볼 거예요. 서기 1944년, 2차 세계대전이 아직 끝나지도 않았을 때, 44개국 대표 730명이 기차를 타고 미국 뉴햄프셔의 깊은 산속 리조트로 모여들어요. 3주 뒤 그들이 들고 나온 건, 앞으로 27년간 세계의 돈을 지배할 약속 한 줄이었어요.
돈의 역사
조개껍데기가 스마트폰 속 숫자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