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만 원권을 한국은행에 가져가도 금은커녕 아무것도 안 줘요. 그런데도 편의점에서는 아무 의심 없이 받아주죠. 돈 뒤에 서 있던 금은 언제, 어떻게 사라졌을까요? 그 답이 서기 1971년 어느 일요일 밤에 있어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일요일 밤 아홉 시, 드라마가 끊겼어요

일요일 밤 아홉 시예요.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화면이 뚝 끊겨요. 그 자리에 대통령이 나타나요. 서기 1971년 8월 15일, 미국 사람들이 겪은 밤이 그랬어요. 화면에 나온 사람은 리처드 닉슨이었죠.
그날 그는 여러 가지를 발표했어요. 그런데 세계가 기억하는 건 딱 한 문장이에요.
"이제 달러를 가져오셔도 금으로 바꿔드리지 않겠습니다."
9화에서 본 그 약속이요.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가져오면 금으로 바꿔준다던 27년짜리 약속이, 그날 밤에 끝났어요. 사람들은 이 사건을 '닉슨 쇼크'라고 불러요.
9화 끝에 접어둔 질문이 이렇게 풀린 거예요. 1화의 기프티콘으로 치면, 카페가 "오늘부터 커피로 안 바꿔드려요"라고 써 붙인 날이죠.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을까요?
처음부터 지킬 수 없는 약속이었어요

사실 이 약속은 시작할 때부터 무리였어요.
서기 1960년, 로버트 트리핀이라는 경제학자가 미국 의회에 나가 이런 경고를 해요. 9화 끝에서 회의장을 조용하게 만든 바로 그 사람이에요. "이 구조는 언젠가 반드시 깨집니다. 누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처음부터 앞뒤가 안 맞게 짜여 있으니까요."
논리는 이래요. 세계 경제가 커지려면 달러가 세상에 넉넉히 돌아다녀야 해요. 다들 달러로 사고팔기로 했으니까요. 그런데 달러를 많이 풀수록, 미국 금고에 있는 금에 비해 달러가 너무 많아져요. 그러면 의심이 시작되죠. "저 달러를 사람들이 다 들고 오면, 미국이 정말 다 금으로 바꿔줄 수 있나?"
4화의 뱅크런과 똑같은 불안이 미국 금고에서 자라고 있던 거예요. 다만 창구에 줄을 서는 게 개인이 아니라 나라였을 뿐이죠.
반대로 달러를 아껴서 조금만 풀면요? 금과의 약속은 지킬 수 있어요. 대신 세계에 돌아다닐 돈이 부족해져요. 돈이 마르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아요.
어느 쪽으로 가도 벽이었어요. 그리고 터질 날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죠.
드골이 배를 보냈어요

1960년대 들어 미국이 돈을 크게 쓰기 시작했어요. 멀리 베트남에서 벌인 전쟁의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대규모 복지 정책까지 겹쳤죠. 세계에 달러가 흘러넘쳤어요.
제일 먼저 손을 든 건 프랑스였어요. 서기 1965년, 드골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해요.
"미국은 외국에 진 빚을 달러로 갚습니다. 그 달러는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는 종이인데도 말이죠."
드골은 말로만 끝내지 않았어요. 프랑스가 가진 달러를 금으로 바꿔달라고 요구했어요. 그리고 뉴욕과 런던 금고에 맡겨뒀던 금을 배와 비행기에 실어 본국으로 옮겨왔어요.
한 나라가 시작하자 다른 나라들도 따라갔어요. 남들이 다 찾아가고 나면 내 몫이 없을지 모르니까요. 나라 단위의 사재기였죠.
미국의 금 보유량은 1949년에 약 21,800톤이었어요. 중형차 한 대를 1.5톤쯤으로 치면, 차 1만 4천 대를 통째로 금으로 만들어 쌓아둔 무게예요. 그게 1971년에는 9천 톤 안팎까지 줄었어요. 20여 년 사이에 절반 넘게 빠져나간 거죠. 이 속도라면 금고가 비는 건 시간문제였어요.
"일시적으로 중단하겠습니다"

서기 1971년 8월, 닉슨은 참모들을 데리고 캠프 데이비드 별장에 사흘간 틀어박혔어요. 그리고 주말이 끝나는 일요일 밤, 곧장 TV 앞에 섰죠.
그날 쓴 공식 표현은 '금 태환의 일시 중단'이었어요. 달러를 가져오면 금으로 바꿔주는 걸 태환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저 말은 "당분간 금으로 안 바꿔드립니다"라는 뜻이에요.
왜 하필 일요일 밤이었을까요? 월요일 아침 시장이 열리기 전에 알려야 했거든요. 요즘도 은행 앱 점검은 사람이 가장 적게 움직이는 주말 새벽에 하잖아요. 세계를 떠받쳐온 약속이 주말 이틀 사이에 끝난 거예요.
닉슨은 분명 '일시적'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달러와 금은 그 뒤로 다시 이어지지 않았어요. 5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요. 잠깐만 올린다던 배달비가 그대로 굳어버리는 일, 우리도 겪어봤잖아요.
금이 빠졌는데도, 돈은 멀쩡했어요

다음 날 아침, 사람들 지갑 속에는 어제와 똑같은 종이가 들어 있었어요. 생김새도, 적힌 숫자도, 그려진 얼굴도 그대로였어요. 달라진 건 그 종이 뒤에 서 있던 약속 하나뿐이었어요. 어제까지는 "가져오면 금으로 바꿔줄게"였는데, 오늘부터는 그게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종이를 그대로 썼어요. 가게는 받아줬고, 월급은 그걸로 나왔고, 세상은 멈추지 않았어요.
1화에서 말한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것, 그 증거가 이 장면이에요. 물건이 본체였다면 금이 빠진 순간 세상이 멈췄어야 하는데, 안 멈췄죠. 남아 있던 게 약속이었으니까요.
이날부터 달러 뒤에는 금 대신 "이건 돈이다"라는 정부의 선언만 남았어요. 이렇게 정부가 정해서 돈이 된 돈을 '명목화폐'라고 불러요. 뒤에 금 같은 알맹이는 없고, 돈이라는 이름표만 남았다는 뜻이죠.
지금 우리 지폐도 1화에서 본 돈의 특징들을 다 갖추고 있어요. 찢어져도 한국은행이 새 걸로 바꿔주고, 계좌에선 1원 단위까지 나뉘고, 아무나 못 만들죠. 달라진 건 딱 하나, 이걸 지켜주는 게 금이라는 물건이 아니라 법과 정부라는 거예요.
페이 앱 잔액을 떠올리면 더 분명해져요. 화면 속 숫자뿐인데 편의점 계산대에 대면 삼각김밥이 나오죠. 금이 빠져나간 자리를 채운 건, 그 숫자를 다들 돈으로 받아주기로 했다는 약속 하나예요.
그래서 이제 브레이크는 하나뿐이에요. 2화의 왕은 은에 구리를 몰래 섞었고, 3화의 원나라는 인쇄기를 멈추지 못했고, 7화의 전쟁은 나라들이 스스로 브레이크를 풀게 했죠. 그리고 1971년 이후 남은 브레이크는 사람들의 믿음 하나예요.
그 하나가 풀리면 어떻게 되는지도 우리는 이미 봤어요. 7화에서 말한 짐바브웨가 서기 2009년에 찍은 100조 짐바브웨달러짜리 지폐가 있어요. 0이 열네 개예요. 다 세기도 전에 지쳐요. 그런데 그 지폐가 나오던 날에도, 한 장으로 빵 한 덩이를 살 수 없었어요. 정부는 여전히 "이건 돈이다"라고 선언하고 있었어요. 사람들이 더는 그 말을 믿지 않았을 뿐이에요. 약속을 믿는 사람이 사라지면, 돈은 그냥 종이가 돼요.
그래서 지금은?

닉슨 쇼크가 우리 일상에 남긴 흔적이 하나 있어요. 매일 뉴스에 나오는 '오늘의 원/달러 환율'이요.
1971년 이전에는 이게 뉴스가 될 수 없었어요. 값이 고정이었으니까요. 지난 화에서 본 것처럼 1달러는 어제도 오늘도 360엔이었죠. 그런데 금이라는 공통의 자가 사라졌어요. 그러자 돈의 값은 그 나라를 얼마나 믿느냐에 따라 매일 흔들리게 됐어요. 그 나라 경제가 믿음직해 보일수록 돈값이 오르는 거죠. 해외 직구 결제 금액이 어제와 오늘 다른 것도, 따지고 보면 그 일요일 밤에서 시작된 일이에요.
9화에 나온 1997년이 바로 이 문제였어요. 그해 한국에는 원화가 멀쩡히 있었어요. 그런데 나라 밖에서 물건을 사려면 달러가 필요했고, 벌어둔 달러가 바닥난 거예요. 원화를 아무리 찍어도 소용없었어요. 세계가 함께 받아주기로 한 약속은 달러였으니까요. 환율은 한 해도 지나지 않아 두 배 넘게 뛰었어요.
그리고 3화에서 접어뒀던 수수께끼가 여기서 풀려요. 만 원짜리에 '바꿔줄게'라는 약속이 안 적힌 이유는, 이제 바꿔줄 것이 없기 때문이에요. 한국은행에 가져가면 깨끗한 새 지폐로 바꿔줄 뿐이죠. 그런데도 우리는 아무 불안 없이 그 종이를 들고 다녀요. 1화에서 조개껍데기를 받던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이유로요. "다른 사람도 이걸 받아줄 거야."
다음 화에서는 그 종이마저 슬슬 사라지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해볼게요. 서기 1949년 뉴욕, 저녁을 먹다 지갑을 두고 온 걸 알아챈 사업가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요. 이 이야기와 함께 세계 최초의 신용카드가 등장해요.
돈의 역사
조개껍데기가 스마트폰 속 숫자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