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무너뜨린 금본위제

전쟁이 무너뜨린 금본위제

전쟁은 왜 돈의 약속부터 깨뜨렸을까?

SeriesFeb 10, 20268 minutes

100년 전 지폐에는 "금으로 바꿔드립니다"라는 문장이 인쇄돼 있었어요. 지금 5만 원권에는 그런 말이 한 줄도 없죠. 그 문장은 어디로, 왜 사라졌을까요? 답이 전쟁이 터진 서기 1914년 여름에 있어요. 어려운 말은 빼고, 약속이 무너진 순서만 따라가 볼게요.

40년짜리 약속이 며칠 만에 사라졌어요

내려진 은행 셔터를 두드리는 펭귄, 다른 날개엔 노란 지폐 한 장

"언제든 금으로 바꿔드립니다."

100년 전 지폐는 1화부터 봐온 그 기프티콘 같은 것이었어요. 금으로 바꿀 수 있는 기프티콘이요. 은행에 가져가면 정해진 만큼 금이 나왔거든요.

이 약속이 40년 넘게 세계 경제를 굴러가게 했어요. 그런데 사라지는 데는 며칠도 걸리지 않았어요. 서기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요.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싸우는 나라들이 거의 동시에 금 바꿔주기를 멈췄어요. 지폐를 들고 은행에 가도 이제 금은 나오지 않았죠. 단골 카페가 하루아침에 "기프티콘 안 받습니다"라고 써 붙인 셈이에요.

6화에서 본 그 튼튼해 보이던 금본위제가, 총성이 울리자마자 사실상 멈춘 거예요.

전쟁은 금고 사정을 봐주지 않아요

텅 빈 거대한 금고 안에 앉아 마지막 금덩이를 안고 있는 펭귄

왜 그렇게 급했을까요? 전쟁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돈이 들어가거든요. 군인 수백만 명에게 월급을 줘야 해요. 대포와 포탄도 끝없이 만들어야 하고요. 그 사람들을 매일 먹이기까지 해야 하죠.

그런데 돈을 금에 묶어두면 금고에 있는 금만큼만 돈을 찍을 수 있어요.

지갑 속 체크카드를 떠올려보세요. 통장에 든 만큼만 긁히고, 잔고가 비면 거기서 끝이에요. 금본위제가 딱 체크카드였어요. 문제는 전쟁이 잔고가 얼마 남았든 봐주지 않는다는 거였고요.

6화에서 말한 그 약점, 위기 때는 손이 묶인다는 게 그대로 터진 거예요. 정부 앞에 놓인 길은 두 개뿐이었어요.

  • 약속을 지킨다 → 돈이 모자라 전쟁에서 진다

  • 약속을 깬다 → 돈을 찍어서 전쟁을 계속한다

나라의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죠. 전쟁 기간에 유럽 각국이 찍어낸 돈은 전쟁 전의 몇 배로 불어났어요.

이번엔 몰래가 아니라 당당하게

거대한 확성기의 나팔 입을 펭귄이 올라타 정면으로 돌려놓는다

돈을 많이 찍으면 값이 떨어지는 건 로마와 원나라에서 이미 봤죠. 그런데 1914년은 결정적으로 달라요. 약속을 어긴 방식이 달랐거든요.

2화의 왕들은 동전에서 은을 몰래 덜어냈고, 5화의 팜스트루크는 없는 구리를 있다고 했다가 사형 선고까지 받았죠. 값어치를 깎는 건 들키면 안 되는 일이었어요.

그런데 1914년의 정부들은 숨지 않았어요. 국민 앞에서, 법을 고쳐서, "오늘부터 금으로 바꿔드리지 않습니다"라고 발표했어요. 그리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았죠. 오히려 나라를 지키기 위한 결단으로 받아들여졌고요.

돈의 역사에서 이 순간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있어요. 약속을 어기는 일이 '범죄'에서 '정책'이 된 거예요.

지금 우리한테는 이게 너무 당연하죠. 한국은행이 금리를 내린다는 뉴스, 정부가 돈을 푼다는 발표를 우리는 범죄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냥 경제 뉴스로 흘려듣죠. 그 감각이 시작된 자리가 1914년이에요.

약속을 어기자 브레이크도 함께 풀렸어요. 금이 브레이크가 될 수 있었던 건 1화에서 본 '아무나 못 구한다'는 특징 덕분이었죠. 땅을 파야 겨우 나오니 마음대로 늘릴 수가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금에서 풀려난 종이돈은 인쇄기만 돌리면 얼마든지 나와요. 3화 원나라에서 통째로 풀렸던 그 브레이크가, 이번엔 전 세계에서 한꺼번에 풀린 거예요.

브레이크 없는 돈이 어디까지 가는지, 독일이 보여줬어요

지폐가 넘쳐흐르는 손수레를 힘겹게 미는 펭귄

서기 1918년 전쟁이 끝났어요. 그런데 진 나라 독일에서, 인류가 그때까지 본 적 없는 광경이 펼쳐져요.

전쟁에서 진 독일은 이긴 나라들에 엄청난 배상금을 물게 됐어요. 그런데 이긴 나라들은 독일 돈인 마르크를 받아주지 않았어요. 금이나 외국 돈, 석탄 같은 실물로 달라고 했죠.

그러니 독일 정부는 마르크를 찍어서 외국 돈을 사들여야 했어요. 6화에서 환율은 두 나라 돈을 바꾸는 비율이라고 했죠. 마르크를 시장에 쏟아낼수록 마르크의 값은 떨어져서, 몇 달 만에 바닥이 안 보일 만큼 내려갔어요.

결정타는 서기 1923년이었어요. 배상금이 밀리자 프랑스와 벨기에가 독일의 공업지대 루르를 점령했어요. 독일 정부는 점령군에 협조하지 말자며 그곳 노동자들에게 "일하지 말고 버티라"고 했고, 그 기간의 월급을 나라가 대신 줬어요. 그 돈은 어디서 났을까요? 또 찍었죠. 공장은 멈췄는데 돈만 늘어난 거예요. 물건은 줄고 돈은 넘치면 값은 하늘로 가요.

숫자로 보면 실감이 나요.

  • 1914년 : 1달러 = 4.2마르크

  • 1923년 11월 : 1달러 = 약 4조 2천억 마르크

1조 배예요. 어제 4,200원 하던 물건이 오늘 4,200조 원이 된 셈이죠. 물건이 귀해진 게 아니라, 마르크가 그만큼 값을 잃은 거예요.

베를린에서 빵 한 덩이가 1922년 말에 160마르크쯤 했는데, 1923년 말에는 2,000억 마르크가 됐어요. 사람들은 빵 사러 갈 때 돈을 수레에 싣고 다녔죠.

지폐 다발로 벽을 도배하고 난로에 넣어 땠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어요. 그 돈으로 장작을 사는 것보다 지폐를 태우는 게 더 쌌으니까요. '돈이 휴지보다 못하다'는 말이 비유가 아니었던 거죠. 이 광경을 본 세계는 어떻게 움직였을까요?

금 대신 '금 보관증'을 갖기로 하다

금 고리와 얇은 종이 고리로 이어진 사슬 맨 아래에 매달린 펭귄

독일의 참상을 본 세계는 겁을 먹었어요. "역시 돈은 금에 묶어둬야 해." 1920년대 각국은 다시 금으로 돌아가려고 했어요. 영국은 서기 1925년, 전쟁 전과 똑같은 비율(1파운드 = 금 7.32g)로 복귀했고요.

그런데 상황이 달라져 있었어요. 전쟁을 치르느라 유럽의 금은 크게 줄었거든요. 그 금은 대부분 미국으로 흘러가 있었고요. 유럽이 전쟁 물자를 사면서 금으로 값을 치렀으니까요. 1920년대 미국이 세계 금의 40% 가까이를 쌓아두고 있었다는 계산도 있어요.

금이 없으면 금에 묶을 수도 없죠. 그래서 나온 절충안이 이거였어요. "금 대신, 언제든 금으로 바꿀 수 있는 돈을 갖고 있으면 되지 않을까?" 내 금고에 금은 없지만 달러나 파운드가 쌓여 있으니 괜찮다는 논리요. 금 대신 금 보관증을 쥐고 있는 셈이에요.

익숙한 구조죠. 페이 앱 잔액의 숫자를 믿는 건 은행 어딘가에 진짜 돈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잖아요. 약속 위에 약속을 한 겹 더 얹은 거예요.

  • 원래 : 내 지폐 → 금 (한 단계)

  • 이제 : 내 나라 돈 → 달러 → 금 (두 단계)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중간에 낀 미국이 "정말 그 달러를 전부 금으로 바꿔줄 수 있어?"라는 의심을 받는 순간, 사슬 전체가 한꺼번에 흔들려요. 이 구조는 20년쯤 뒤에 훨씬 큰 규모로 다시 등장하고, 정확히 같은 이유로 무너져요.

그래서 지금은?

터지기 직전까지 부푼 거대한 노란 돈 풍선을 올려다보며 가리키는 펭귄

이 광경은 그 뒤로도 되풀이됐어요. 서기 2009년 짐바브웨는 100조 짐바브웨달러짜리 지폐를 찍었고, 최근에는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비슷한 길을 걸었죠.

사실 우리도 매일 이 이야기의 아주 약한 버전 속에 살아요. 2화 로마에서 봤던 인플레이션이요. 물가 상승률 3%면 견딜 만하지만, 문제는 이게 30%, 300%가 되는 순간이에요. 독일이 겪은 초인플레이션은 우리가 매년 겪는 그 인플레이션이 브레이크를 완전히 잃은 상태예요.

이번 화에서 진짜로 무너진 건 금이 아니라 약속이었어요. "언제든 금으로 바꿔드립니다." 이 문장은 종이에 인쇄까지 돼 있었어요. 그런데 나라가 살아남느냐 마느냐 앞에서는 하루아침에 취소될 수 있는 것이었죠.

지금 5만 원권이 5만 원인 이유는 종이가 5만 원어치라서가 아니라, 2화부터 봐온 그 '한국은행' 글자와 우리가 그걸 받아준다는 사실 때문이에요. "금으로 바꿔드립니다"라는 문장은 어디에도 없는데, 우리는 그 종이를 받죠.

1화에서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라고 했잖아요. 이 말에는 서늘한 뒷면이 있어요. 약속은 지켜지는 동안에만 돈이에요. 그리고 그 약속을 취소할 수 있는 사람이, 약속을 한 그 사람이고요. 지금 우리 지갑 속 5만 원권도, 통장에 찍힌 숫자도 똑같은 조건 위에 서 있어요.

서기 1929년 10월, 뉴욕 주식시장이 무너져요.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져요. 사람들이 굶고 은행이 줄줄이 문을 닫는데, 각국 정부는 돈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더 조여요. 왜 그랬을까요? 손발을 묶고 있던 게 바로 금이었거든요. 다음 화는 대공황, 금본위제가 최후를 맞는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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