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루 낸 돈을 떠올려 보세요. 편의점, 지하철, 커피까지 전부 카드나 휴대폰이었을 거예요. 현금 한 장 없이도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죠. 손에 쥐던 돈은 어쩌다 화면 속 숫자가 됐을까요? 답은 지난 70년 사이에 있어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지금 지갑에 현금이 얼마나 있나요

불과 30년 전만 해도 지갑에 현금이 없다는 건 아무것도 살 수 없다는 뜻이었어요. 지금은 카드를 대거나 휴대폰을 대거나 앱 버튼을 누르면 끝이라, 현금 없이도 하루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가죠.
10화까지, 돈이 금에서 풀려나 믿음 하나로 굴러가게 되는 과정을 봤죠. 그다음에 벌어진 일이 바로 이거예요. 돈이 아예 눈에서 사라진 거예요.
그런데 이 변화는 10화의 1971년보다 먼저, 나라들이 금과 달러를 두고 씨름하는 동안 이미 시작되고 있었어요. 시계를 되감아 서기 1949년, 뉴욕의 한 식당으로 가볼게요.
사업가 프랭크 맥나마라가 맨해튼의 레스토랑에서 거래처 사람들과 저녁을 먹었어요. 계산하려는데 지갑을 집에 두고 온 걸 깨달았죠. 결국 아내에게 전화해 돈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야 했어요. 그날 밤 그는 이런 생각을 했대요. "지갑을 깜빡한 날에도 밥값은 낼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리고 다음 해인 서기 1950년, 그는 '다이너스 클럽' 카드를 세상에 내놨어요.
신용카드를 판 건 카드가 아니라 이야기였어요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 하나. 이 지갑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커요.
다이너스 클럽의 홍보를 맡았던 매티 시먼스가 훗날 이렇게 털어놨거든요.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지어낸 이야기다."
실제로는 훨씬 덜 극적이었어요. 맥나마라는 몇 달 동안 맨해튼 식당들을 하나하나 돌아다녔어요. "제발 이 카드 좀 받아주세요." 그렇게 겨우 얻어낸 결과였죠.
그런데 사람들은 지루한 영업 이야기보다 '지갑을 두고 온 남자' 이야기를 훨씬 잘 기억했어요.
내 지갑 속 카드는 처음에 왜 만들었더라, 한번 떠올려 보세요. 약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고른 사람은 드물어요. 광고에서 본 문장 하나, 친구가 지나가듯 한 말 한마디가 남아서 만든 경우가 대부분이죠. 7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아요.
결국 카드를 세상에 판 건 카드가 아니라 이야기였던 셈이에요. 그럼 그 카드는 실제로 어떻게 굴러갔을까요?
외상장부에서 진짜 빚으로

초기 다이너스 클럽은 지금 우리가 아는 카드와 많이 달랐어요. 재질은 플라스틱이 아니라 종이였어요. 쓸 수 있는 곳도 식당 위주였고요. 출발할 때 카드를 받아주는 가게는 27곳, 회원은 학교 한 학년 수준인 200명 남짓이었다고 해요.
결정적인 차이는 따로 있었어요. 이번 달에 쓴 돈은 다음 달에 전액 갚아야 했거든요. 나눠 갚는 건 안 됐어요. 동네 가게 외상장부를 떠올리면 돼요. 주인이 공책에 이름과 금액을 적어두고 월말에 한 번에 받는 그 장부요. 다이너스 클럽은 그 장부의 고급 버전이었어요.
진짜 변화는 은행들이 뛰어들면서 왔어요. 서기 1958년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뱅크아메리카드'를 내놨는데, 나중에 이름을 바꾼 게 바로 비자(Visa)예요. 은행은 원래 돈을 빌려주는 곳이니 카드값도 몇 달에 걸쳐 나눠 갚게 해줬어요. 대신 이자를 받으면서요. 오늘 우리가 누르는 '3개월 할부' 버튼이 여기서 시작됐고, 카드는 이때부터 편한 결제 수단을 넘어 진짜 '빚'이 됐어요.
그리고 8년 뒤인 서기 1966년, 비자가 잘되는 걸 지켜보던 다른 은행들도 가만있지 않았어요. 한 곳씩 따로는 비자를 이길 수 없으니, 여러 은행이 손을 잡고 카드를 같이 만들기로 한 거예요. 그 모임이 이름을 바꾸고 또 바꾼 끝에 지금의 마스터카드가 됐어요.
같은 해, 미국의 한 은행은 정반대 방향의 카드를 실험했어요. 빌리는 게 아니라 내 통장에서 곧바로 돈이 빠져나가는 카드요. 우리가 쓰는 체크카드가 이 계열이에요.
지금 우리 카드 구석에 찍힌 비자나 마스터카드 글자가 그 시절의 흔적이에요. 그리고 빌려 쓰든 바로 빼 쓰든 결과는 같았죠. 사람들 지갑에서 현금이 줄기 시작한 거예요.
카드값 내는 날, 우리는 지난달의 나에게 갚아요

카드로 10만 원짜리 물건을 사면, 그 순간 내 돈이 나가는 게 아니에요. 카드 회사가 대신 내주고, 나는 나중에 갚죠. 신용카드는 돈이 아니라 빚이에요. 카드 회사가 나를 믿고 먼저 내준다는 뜻이라, 이름부터가 '신용'카드고요.
남 얘기가 아니에요. '3개월 무이자 할부'는 지금 없는 돈을 세 달에 나눠 갚겠다는 약속이에요. '리볼빙'은 이번 달 카드값을 다 못 갚아서 남은 걸 다음 달로 미루는 거고요. 미룬 만큼 이자가 붙어요.
매달 결제일 아침, 알림이 울리고 통장 잔고가 훅 줄어들죠. 지난달의 내가 쓴 돈을 이번 달의 내가 갚는 거예요. 지난달의 나는 참 잘도 썼는데 말이죠.
4화의 금세공사들이 금고의 금보다 많은 보관증을 써줬던 것처럼, 지금 없는 돈을 당겨 쓰는 구조는 돈의 역사에서 계속 반복돼요. 그리고 반복될 때마다 같은 질문이 따라붙죠. 어디까지 당겨 써도 괜찮을까?
한국은 이 질문의 답을 꽤 비싸게 배웠어요. 서기 1999년, 정부는 카드 사용을 늘리려고, 카드로 쓴 만큼 연말에 세금을 깎아주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남아 있는 신용카드 소득공제예요. 다음 해엔 카드 영수증으로 복권도 뽑게 했고요. 카드는 기록이 남아 가게가 번 돈을 숨길 수 없으니, 거래도 투명해지고 소비도 살아난다는 계산이었죠.
그런데 카드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카드를 뿌리기 시작했어요. 소득이 없는 학생 손에까지 카드가 쥐어졌고요. 결국 서기 2003년, 이른바 '카드 대란'이 터졌어요. 빚을 제때 갚지 못하는 사람이 400만 명 가까이 됐죠. 웬만한 대도시 하나가 통째로 빚을 못 갚고 있었던 셈이에요.
돈이 눈에 안 보이면 쓰기는 쉬워져요. 그런데 갚는 일까지 쉬워지진 않아요.
지갑이 통째로 사라지기까지

카드 대란 몇 해 전으로 잠깐 돌아가면, 1990년대엔 인터넷이 돈을 한 번 더 바꿔놓고 있었어요. 서기 1999년 '페이팔'이라는 서비스가 나오면서 이메일 주소만 알면 서로 돈을 보낼 수 있게 됐죠. 지금 우리가 메신저에서 송금 버튼을 누르는 것과 똑같아요. 은행에 갈 일도, 현금을 만질 일도 없어졌어요.
2000년대엔 온라인 쇼핑이 폭발했어요. 카드 번호를 한 번 넣으면 지구 반대편 물건이 집 앞까지 왔으니까요.
그리고 2010년대, 스마트폰이 결정타를 날렸어요. 애플페이, 삼성페이, 카카오페이. 이제는 카드조차 꺼낼 필요가 없어요. 편의점 계산대에 휴대폰을 갖다 대면 끝이에요.
한국은 특히 이 변화가 빨랐어요. 한국은행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결제 열 번 중 현금을 쓰는 건 이제 한두 번뿐이에요. 2013년만 해도 열 번 중 네 번은 현금이었는데, 10년 남짓 만에 이만큼 줄었죠.
이제 현금을 만지는 순간을 떠올려 보면 손에 꼽혀요. 세뱃돈을 줄 때, 시장 좌판에서 나물을 살 때 정도죠. 그마저도 ATM을 찾아 한참 헤매고요. 인류가 5천 년 동안 손에 쥐고 살던 물건이, 한 세대 만에 손에서 빠져나갔어요.
그 100만 원은 어디에 있을까

은행 앱 잔고에 100만 원이 있다고 해볼게요. 그 100만 원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요?
은행 금고에 내 이름표가 붙은 지폐 다발이 쌓여 있을까요? 아니에요. 그건 은행 컴퓨터에 적힌 숫자예요. 화면에 뜬 그 숫자 말고 다른 형태의 '내 돈'은 어디에도 없어요.
친구에게 3만 원을 보내면 어떻게 될까요. 내 숫자가 3만 줄고, 친구 숫자가 3만 늘어요. 카드를 긁어도 마찬가지예요. 내 숫자가 줄고 가게의 숫자가 늘 뿐, 물리적으로 이동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신기하게도 이 화면 속 숫자는 1화에서 본 돈의 특징들을 다 갖췄어요. 데이터라 썩지 않고, 1원 단위로도 쪼개지고, 은행 장부에만 쓸 수 있으니 아무나 못 만들고, 나라 안 어디서나 통하죠.
금과 은이 통과했던 시험을, 수천 년 뒤의 숫자도 통과한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이제 월급도 카드값도 숫자로 들어왔다 숫자로 나가요. 그 숫자에 기분이 오르내리고요.
그런데 바뀐 건 돈의 모습이지 정체가 아니에요. 2화의 도장부터 10화의 정부 선언까지 보증인이 계속 바뀌어 왔을 뿐, 돈이 약속이라는 사실은 그대로죠. 1화에서 조개껍데기를 주고받던 사람과 계산대에 휴대폰을 갖다 대는 우리는, 정확히 같은 일을 하고 있는 거예요.
다만 여기서 누군가는 이렇게 물었어요. "그 보증인이 꼭 있어야 할까?"
다음 화에서는 그 질문에 진짜로 답을 내놓은 사람 이야기를 해볼게요. 서기 2008년, 금융위기 한복판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논문 한 편을 올려요. 정부도 은행도 필요 없는 돈을 만들겠다고요.
돈의 역사
조개껍데기가 스마트폰 속 숫자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