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튼우즈 체제, 달러와 금의 결혼

브레튼우즈 체제, 달러와 금의 결혼

달러는 어떻게 세계의 기준이 됐을까?

SeriesFeb 11, 20267 minutes

해외 직구 결제창엔 원화가 아니라 달러가 찍혀 있어요. 세계의 돈이 달러가 된 날은 정확히 짚을 수 있어요. 서기 1944년, 미국 산속 호텔에서 열린 3주짜리 회의였죠. 그날 무슨 약속이 오갔고, '아이엠에프'라는 이름은 왜 거기서 나왔을까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산속 호텔에 44개국이 모였어요

거대한 원형 탁자 위로 기어 올라가는 펭귄

서기 1944년 7월, 미국 뉴햄프셔주의 브레튼우즈라는 작은 마을이에요. 산으로 둘러싸인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 44개국 대표 730명이 모였어요. 8화 끝에서 말한 그 장면이죠. 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의 총성이 아직 멎지 않았을 때였어요.

전쟁이 한창인데, 각국 대표들은 왜 산속 호텔에 모여 3주씩이나 돈 이야기를 했을까요?

8화에서 본 것처럼 금본위제는 이미 무너져 있었어요. 6화에서 말한 '눈금이 움직이지 않는 자'가 사라진 거죠.

자가 없어지자 나라들은 저마다 제 살길만 찾았어요. 자기 나라 돈값을 일부러 떨어뜨려 물건을 싸게 팔고, 남의 나라 물건엔 높은 세금을 매겼죠. 상대도 똑같이 갚아줬고요. 언제 문이 닫힐지 모르니 아무도 배를 띄우지 않았고, 세계 무역은 반 토막이 났어요. 다들 먹고살기 힘들어지고 앙금만 쌓이다가, 결국 또 한 번의 세계대전으로 번졌죠.

그래서 모인 거예요. 돈 문제로 등을 돌리다 전쟁까지 갔으니, 이번엔 싸우기 전에 규칙부터 정해두자.

케인스의 '세계 공통 돈'은 왜 사라졌을까

펭귄 키를 넘는 거대한 금덩이 더미 꼭대기에 펭귄이 올라서 있다

3주는 사이좋은 회의가 아니었어요. 주인공이 둘 있었거든요.

영국 대표는 당대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던 케인스였어요. 그의 생각은 이랬어요. 어느 한 나라의 돈이 세계의 중심이 되면 그 나라만 유리해진다. 그러니 어느 나라 것도 아닌 새 돈을 만들자. 이름까지 지어뒀어요. '방코르'요.

미국 대표 해리 화이트의 답은 단호했어요. 그럴 필요 없다고, 달러가 있지 않냐고요.

카페마다 적립 포인트가 제각각이잖아요. 케인스는 "어느 가게 것도 아닌 공통 포인트를 하나 만들자"고 한 거예요. 화이트는 "제일 큰 가게 포인트를 다 같이 쓰면 되지 않냐"고 한 거고요.

사실 승부는 회의가 열리기 전부터 기울어 있었어요. 당시 세계 금의 3분의 2가 미국 금고에 있었거든요. 유럽은 폐허가 됐지만 미국은 본토에서 전쟁을 겪지 않았어요. 오히려 전쟁 물자를 팔아 부자가 됐고요.

방코르는 종이 위에서 사라졌어요. 달러가 세계의 돈이 됐고요. 이긴 건 논리가 아니라 금고였어요.

금 1온스에 35달러, 못을 박다

땅에 깊이 박힌 거대한 못 대가리 위에 펭귄이 올라서서 온몸으로 눌러 박고 있다

3주 끝에 나온 합의를 브레튼우즈 체제라고 불러요. 회의가 열린 마을 이름을 그대로 붙인 거예요. 규칙은 의외로 단순해요. 세 줄이면 끝나요.

  • 미국 달러만 금에 묶는다. 금 1온스는 35달러 - 이 값은 바뀌지 않는다

  • 다른 나라 돈은 달러에 묶는다

  • 각국 중앙은행이 달러를 가져오면 미국이 금으로 바꿔준다

1온스는 8화에서 봤던 그 30g 남짓의 금이에요. 그 한 줌을 딱 35달러에 묶어둔 거죠.

두 번째 규칙에 따라 나라별 환율도 하나씩 정해졌어요. 1달러에 360엔, 1달러에 4.2마르크 같은 식으로요. 요즘은 환율이 매일 움직이지만, 그때는 그 숫자가 못을 박아둔 것처럼 붙박이였어요. 물건을 수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값이 내일 얼마가 될지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었죠.

단, 세 번째 규칙엔 조건이 있었어요. 미국의 금 창구에 갈 수 있는 건 각국 정부와 중앙은행뿐이라는 것. 개인이 달러 뭉치를 들고 가서 금을 달라고 할 수는 없었죠. 이 제한이 다음 화에서 아주 중요해져요.

재미있는 건 일본과 독일이에요. 전쟁의 적국이라 회의장엔 오지도 못했는데, 몇 년 뒤엔 스스로 이 체제에 들어와 자기 돈을 달러에 묶었거든요. 그만큼 이 세 줄은 결국 하나의 약속으로 통했어요.

결국은 한 문장짜리 약속이었어요

자기보다 큰 금반지에 매달린 펭귄

세 줄을 다 벗겨내면, 미국이 세계에 건넨 문장 하나만 남아요.

"달러를 가져오시면 금으로 바꿔드릴게요."

1화에서 말한 그대로예요.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고, 바뀌는 건 언제나 약속하는 사람이죠. 이번 보증인은 미국이었어요.

1화의 기프티콘으로 치면, 세계가 손에 쥔 건 이미지 한 장이고 바꿔주겠다고 약속한 카페가 미국이었던 셈이에요. 그럼 그 카페가 약속을 버거워하는 날이 오면 어떻게 될까요? 이 질문은 잠시 접어두고 갈게요.

8화에서 금본위제는 끝났다고 했는데, 금이 여기 다시 나와요. 사라진 게 아니라 달러 뒤로 자리를 옮긴 거예요. 다만 결정적으로 달라진 게 있어요. 이제 금과 직접 연결된 나라는 미국 하나뿐이고, 나머지 나라들은 미국의 약속을 믿어야 해요. 그리고 이 회의가 남긴 건 약속만이 아니었어요. 이름 두 개도 남겼죠.

그날 만들어진 IMF, 53년 뒤 한국에 와요

거대한 우산 손잡이를 눌러 땅에 박아 세우는 펭귄

이 회의에서는 기구도 두 개 만들어졌어요. 국제통화기금(IMF)세계은행이에요. IMF는 나라의 달러가 갑자기 마를 때 급전을 빌려줘요. 세계은행은 전쟁으로 부서진 나라를 다시 세우는 데 돈을 대주고요.

네, 어른들이 "아이엠에프 때"라고 말할 때의 그 IMF 맞아요. 서기 1997년, 나라 금고에 달러가 바닥난 한국에 급전을 빌려주고, 대신 나라 살림을 뜯어고치라는 조건을 붙였던 곳이요. 회사가 문을 닫고 멀쩡히 다니던 사람이 아침에 갈 곳을 잃던 그 시절의 이름이, 이 산속 호텔에서 만들어진 거예요.

이 조직들은 8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남아 있어요. 하지만 그건 나중 얘기고, 1944년의 세계는 이제 막 황금기로 들어서는 참이었죠.

황금기, 그리고 아무도 못 본 함정

금이 간 거대한 동전 위에 올라타 균형을 잡는 펭귄

체제가 굴러가기 시작하자 달러는 정말로 세계의 돈이 됐어요. 나라끼리 물건을 사고팔 때 달러로 값을 치렀어요. 각국 중앙은행은 달러를 금고에 쌓았고요.

여기서 기축통화라는 말이 나와요. '세계가 공통으로 쓰기로 한 돈'이라는 뜻이에요. 태국 사람이 브라질에서 커피 원두를 살 때 바트도 헤알도 아닌 달러로 값을 치르잖아요. 서로의 돈은 못 믿어도 달러는 둘 다 믿으니까요. 그게 기축통화예요.

환율이 흔들리지 않으니 나라 사이 장사가 마음 놓고 늘었어요. 194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세계 경제는 놀라운 속도로 성장했어요. 이 시기를 자본주의의 황금기라고 부르기도 해요.

그런데 이 완벽해 보이는 약속에는 처음부터 함정이 하나 숨어 있었어요. 서기 1960년, 벨기에에서 건너온 한 경제학자가 미국 의회에서 그 함정을 처음 입 밖에 냈을 때, 회의장이 조용해졌다고 해요.

그래서 지금은?

거대한 지폐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펭귄, 끊긴 끈이 늘어져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는 27년 만에 끝났어요. 그런데 그날 정해진 것 중 하나는 아직 그대로예요. 세계의 돈은 여전히 달러라는 것.

해외 직구를 하면 결제창에 원화가 아니라 달러가 떠요. 기름값도 커피 원두값도 비행기표값도 달러로 매겨지고요. 뉴스에서 "환율이 1,400원을 넘었다"고 할 때, 그건 달러 한 장이 원화로 얼마냐는 얘기예요. 통장 잔고는 어제와 똑같은데 바다 건너 물건값만 올라 있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브레튼우즈는 달러 뒤에 진짜 금이 서 있던 마지막 시대였어요. 지금 세계의 돈 뒤에는 그 금마저 없죠.

아까 접어둔 질문, 그 경제학자가 본 함정, 그리고 약속이 깨지던 날의 이야기를 다음 화에서 볼게요. 서기 1971년 8월 어느 일요일 밤, 미국 사람들이 보던 저녁 드라마가 갑자기 끊겨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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