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장에 몇백 원씩 붙는 이자, 대출 상담에서 듣는 "연 몇 퍼센트". 매일 스치듯 지나가는 이 숫자는 은행보다 수천 년 앞서 생겼어요. 남의 돈을 빌려 쓰면서 왜 얹어 갚아야 할까요? 그 답이 5,000년 전 점토판에 이미 적혀 있어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씨앗을 빌려준 농부
지금으로부터 5,000년쯤 전, 메소포타미아(지금의 이라크 근처)의 농부 한 사람을 상상해 볼게요. 봄이 왔는데 옆집 농부가 찾아와요. "올해 씨앗이 부족해서 농사를 못 짓겠어. 네 씨앗 좀 빌려줄 수 있어?"
착한 마음에 씨앗을 빌려줬어요. 가을이 왔고, 옆집 농부는 무사히 수확을 했고, 빌렸던 만큼 그대로 돌려줬어요. 숫자는 딱 맞아떨어져요. 그런데 빌려준 쪽 마음은 어딘가 개운하지 않아요.
"나도 그 씨앗을 직접 심을 수 있었는데." 심었다면 가을에 몇 배로 불어났을 씨앗이에요. 게다가 여름 내내 불안했어요. "흉년이 들면? 저 사람이 못 갚으면?"
기다려준 시간, 그리고 대신 떠안은 불안. 이 두 가지에 값을 매기는 게 이상한 일일까요? 바로 이 질문에서 이자(利子)가 생겼어요.
점토판에 남은 인류 최초의 이자
이자의 기록은 놀랍도록 오래됐어요.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 문명, 점토판에 쐐기문자로 눌러 적은 거래 내역에 이미 이자가 등장해요.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이에요.
사람들은 곡물이나 은을 빌려주고, 돌려받을 때 원래보다 더 많이 받았어요. 씨앗 100자루를 빌려줬으면 가을에 120~140자루를 돌려받는 식이었죠.
재밌는 건 이때 이미 빌려주는 물건에 따라 이자가 달랐다는 거예요. 곡물을 빌려줄 때는 이자가 높았고, 은을 빌려줄 때는 낮았어요.
왜 그랬을까요? 곡물은 흉년이 들면 돌려받기가 어렵고, 돌려받아도 창고에서 썩거나 쥐가 먹어 값이 떨어져요. 은은 그대로 남고요. 못 돌려받을 걱정이 큰 쪽에 이자를 더 얹은 거예요. 위험이 클수록 이자가 높다는 원리가 점토판 위에서 이미 굴러가고 있었죠. 그리고 이 원리는 곧 법에까지 적혀요.
함무라비 법전, 세계 최초의 이자 상한선
기원전 1750년경, 바빌로니아의 함무라비 왕이 법전을 만들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유명한 그 법전이요. 그런데 여기에 이자율 상한선이 적혀 있어요. 이자율은 빌린 것에 몇 퍼센트를 얹어 갚는지를 말해요. 100자루를 빌리고 130자루를 갚으면 이자율 30%인 거죠.
곡물을 빌려줄 때 : 이자율 상한 33~40%
은을 빌려줄 때 : 이자율 상한 17~20%
학자마다 해석이 조금씩 다르지만, 법으로 정한 상한선에서도 위험이 큰 쪽이 비쌌다는 점은 똑같아요.
왜 이런 법까지 필요했을까요? 규제가 없으면 빌려주는 쪽은 얼마든지 높은 이자를 부를 수 있어요. 당장 급한 사람은 그걸 받아들일 수밖에 없고요. 그 시절엔 못 갚으면 땅을 넘긴다는 약속을 걸고 빌렸는데, 이자가 불어나면 땅을 빼앗기고 끝내 노예로 팔려가기도 했어요. 함무라비 왕은 이 폭리를 막으려 한 거예요. 지금 우리나라도 법으로 최고 이자율을 연 20%로 묶어두고 있죠. 3,800년째 같은 고민을 하고 있는 셈이에요.
그런데 애초에 이자는 무엇의 값일까요?
이자의 정체 : 시간의 값 + 위험의 값
이 질문에 답해보면 금방 잡혀요.
오늘의 100만 원과 1년 뒤의 100만 원은 같은 값일까요?
대부분 오늘 쪽이 낫다고 느낄 거예요. 오늘 100만 원이 있으면 뭔가를 사거나, 굴리거나, 맛있는 걸 먹을 수 있으니까요. 1년을 기다리는 사이 물건값이 올라 같은 100만 원으로 살 수 있는 게 줄어들 수도 있고, 갑자기 돈이 급해질 수도 있고요.
그러니까 누군가에게 돈을 빌려준다는 건 내 시간을 넘겨주는 일이에요. 이자는 그 시간에 붙는 값이에요. 기다림에 대한 보상, 그리고 "혹시 못 갚으면 어쩌지"라는 불안에 대한 보상이죠.
한 줄로 줄이면 이래요.
이자 = 시간의 값 + 위험의 값
오래 맡길수록 시간의 값이 커지고, 떼일 걱정이 클수록 위험의 값이 커지죠. 그런데 이 당연해 보이는 계산을 두고, 인류는 수천 년을 싸웠어요.
"돈이 돈을 낳는다고?" - 아리스토텔레스의 반박
이자가 지금은 당연해 보이지만, 역사적으로는 엄청난 논쟁거리였어요.
함무라비로부터 1,400년쯤 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자를 대놓고 비판했어요. 논리는 이랬어요. "돈은 원래 교환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돈이 돈을 낳는다? 이건 자연스럽지 않다."
씨앗을 빌려주면 씨앗은 자라서 곡물이 돼요. 소를 빌려주면 새끼를 낳기도 하고요. 하지만 은화 100개가 스스로 110개가 되지는 않잖아요. 돈은 스스로 자라지 않는데 왜 불어나느냐는 거죠.
지금 들으면 고집스러운 말 같지만, 이 생각은 이후 기독교와 이슬람에 엄청난 영향을 끼쳐요. 중세 유럽에서 이자가 "죄악"으로 취급받은 뿌리가 여기예요.
그래서 지금은?
우리는 통장에 돈을 넣는 걸 '맡긴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내가 은행에 돈을 빌려주는 것이에요. 은행은 그 돈을 다시 남에게 빌려주고요. 그래서 은행이 나에게 이자를 줘요. 수메르 농부가 씨앗을 빌려주고 더 받아온 것과 구조가 똑같아요.
그 빌려준 값이 지금 얼마인지는 통장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어요. 시중은행 1년 정기예금은 연 2.9~3.2%, 저축은행 1년 정기예금은 연 3.4~3.6% 정도예요. 그 아래에는 한국은행 기준금리 연 2.75%가 깔려 있어요. 한국은행은 나라의 돈을 관리하는 곳이고, 기준금리는 나라 안 모든 금리의 출발점이 되는 숫자예요. 이 숫자 이야기는 7화에서 제대로 할게요.
왜 저축은행이 더 줄까요. 앞의 곡물과 은 이야기가 그대로 반복되고 있는 거예요. 저축은행은 시중은행보다 규모가 작아서 사람들이 조금 더 불안해하거든요. 그러니 더 높은 이자를 얹어야 내 돈을 데려올 수 있죠. 두 숫자 사이의 간격이 곧 위험의 값이에요.
그러니 금리가 유난히 높은 상품을 만나면, 좋은 조건이라고 반가워하기 전에 이렇게 물어보면 돼요 : 이 이자는 시간의 값일까, 위험의 값일까? 대출 금리가 높게 나왔을 때도 같은 질문이 통해요. 그 숫자는 나에게 붙은 위험의 값을 계산한 결과거든요.
5,000년 전 점토판에 적힌 원리가 오늘 내 통장 금리 옆에 그대로 붙어 있는 셈이에요. 다음 화에서는 이 이자가 어쩌다 '죄악'이 됐는지를 따라가볼게요. 기독교는 이자를 죄라고 했고, 이슬람은 지금도 이자를 금지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이자가 다시 '당연한 것'이 됐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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