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이 돈을 만든다고?

은행이 돈을 만든다고?

내가 맡긴 1,000만 원은 정말 은행 금고에 있을까요?

SeriesFeb 15, 20268 minutes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면, 그 돈이 어딘가 금고에 차곡차곡 쌓여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내가 맡긴 돈의 대부분은 은행에 없어요. 이미 누군가의 전세자금으로, 누군가의 사업자금으로 나가 있죠. 그리고 그 과정에서 원래 없던 돈이 생겨나요.

내 돈은 금고에 없어요

지난 화에서 은행이 예대마진으로 돈을 번다는 걸 봤어요. 예금자에게 이자를 주고, 대출자에게 더 높은 이자를 받아서, 그 차이를 남기는 구조였죠.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 볼게요. 우리가 은행에 1,000만 원을 맡기면, 은행은 그 돈을 금고에 그대로 보관하고 있을까요?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은행은 예대마진을 벌 수조차 없었을 거예요. 은행은 우리가 맡긴 돈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꽤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4화에서 본 런던 금세공사가 발견한 것과 똑같은 원리예요. 100명이 금을 맡겼는데 동시에 찾으러 오는 사람은 기껏해야 10명이다. 그걸 알아챈 순간, 금의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빌려줄 수 있게 됐죠.

현대 은행도 같은 방식으로 움직여요. 예금자의 돈을 전부 보관하지 않고, 법으로 정해진 비율만 남긴 뒤 나머지를 대출해 줘요. 이 남겨두는 비율을 지급준비율이라고 불러요. 예금자가 돈을 찾으러 왔을 때 지급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비율, 딱 그 뜻이에요.

한국은 예금 종류에 따라 다른데, 요구불예금(자유롭게 넣고 뺄 수 있는 예금)은 7%, 정기예금과 정기적금은 2%예요. 뒤집어 말하면 은행은 맡은 돈의 93~98%를 대출이나 투자에 굴릴 수 있다는 얘기예요.

1,000만 원이 1억 원이 되는 과정

이 대출이 반복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주 단순한 예로 따라가 볼게요. 계산이 눈에 잘 들어오도록 예를 들어 지급준비율을 10%로 가정할게요. 실제 한국의 비율보다 훨씬 높게 잡은 가상의 숫자예요.

1단계. 민수가 A은행에 1,000만 원을 예금해요. A은행은 100만 원을 지급준비금으로 남기고 900만 원을 지영에게 대출해요.

여기서 잠깐 멈춰 볼게요. 민수의 통장에는 여전히 1,000만 원이 찍혀 있어요. 민수는 언제든 자기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죠. 그런데 동시에 지영도 900만 원을 손에 쥐었어요. 경제 전체로 보면 원래 1,000만 원이던 돈이 1,900만 원처럼 기능하고 있는 거예요.

2단계. 지영은 이 900만 원으로 가구를 사요. 가구점 사장님은 받은 900만 원을 B은행에 입금하고, B은행은 90만 원을 남긴 뒤 810만 원을 준호에게 대출해요.

3단계. 준호는 810만 원으로 노트북을 사요. 그 판매 대금이 C은행으로 흘러가고, C은행은 81만 원을 남기고 729만 원을 또 대출해요.

1,000만 + 900만 + 810만 + 729만 + 656만… 이렇게 조금씩 줄어드는 덧셈이 끝없이 이어져요. 그 합이 이론적으로 최대 1억 원이에요. 1,000만 원을 지급준비율 10%로 나눈 값이죠. 민수가 맡긴 1,000만 원 하나가 은행 시스템을 돌고 돌면서 1억 원어치 예금을 만들어 낸 거예요. 지폐가 물리적으로 늘어난 건 아닌데, 통장에 찍힌 숫자로 보면 분명히 돈이 늘어났어요.

이것이 신용창조예요. 은행 시스템이 대출과 예금을 반복하면서, 원래 있던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경제 안에 만들어내는 현상이에요. 다만 1억 원은 이론적 최대치예요. 현실에서는 대출받은 사람이 그 돈을 전부 다시 은행에 넣지도 않고, 현금으로 들고 있는 부분도 있어서 실제 규모는 이보다 작아요.

왜 이런 게 가능할까요?

여기서 늘어난 건 지폐가 아니라 통장에 찍힌 숫자예요. 금세공사가 맡은 금보다 더 많은 보관증을 써준 것과 똑같죠. 종이 대신 장부의 숫자가 늘어난 것뿐이에요.

없는 돈을 만들어도 괜찮을까요?

없는 돈을 만들어내는 게 위험하지 않냐는 생각이 들 수 있어요. 그런데 신용창조가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민수가 1,000만 원을 맡기면 은행은 딱 1,0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 경제에 돈이 충분히 돌지 않겠죠. 기업은 공장을 짓고 싶어도 대출을 받기 어렵고, 사람들은 집을 사고 싶어도 돈을 빌리기 어려워요.

신용창조 덕분에 경제에 충분한 돈이 돌 수 있어요. 기업은 투자 자금을 빌리고,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돈을 쓰고, 그렇게 경제가 성장해요. 중앙은행이 실제로 찍어내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경제 안에서 굴러가는 것, 이게 현대 경제가 작동하는 핵심 장치 중 하나예요.

물론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요. 신용창조가 과도해지면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자산 가격이 급등하거나 물가가 오를 수 있어요. 그래서 중앙은행은 지급준비율이나 기준금리 같은 도구로 그 규모를 조절해요. 기준금리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룰게요.

전제가 무너지면 뱅크런

이 모든 게 모든 예금자가 동시에 돈을 찾으러 오지는 않는다는 전제 위에 서 있어요. 그런데 그 전제가 무너지면요?

어느 날 뉴스에서 어떤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져요. 불안해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창구로 달려가요. 하지만 은행에는 전체 예금의 일부만 남아 있어요. 나머지는 이미 대출로 나가 있으니 모든 사람에게 돈을 돌려줄 수 없어요. 이것이 뱅크런이에요.

뱅크런이 특히 무서운 이유는 소문만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는 점이에요. 실제로는 건전한 은행이라도, 위험하다는 말에 사람들이 몰려가면 정말로 지급 불능에 빠질 수 있어요. 게다가 한 은행에서 시작된 불안은 옆 은행으로 번지기도 하고요.

그래서 안전장치가 있어요

현대 금융 시스템에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한 장치가 마련돼 있어요.

첫째는 예금자보호제도예요. 한국에서는 예금보험공사가 1인당 1억 원까지 예금을 보호해 줘요. 2025년 9월에 5,000만 원에서 1억 원으로 올라간 한도죠. 은행이 망하더라도 1억 원까지는 돌려받을 수 있어요. 이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굳이 서둘러 돈을 찾을 필요가 없다는 심리적 안전망이 돼요. 뱅크런을 미리 막는 장치인 셈이에요.

둘째는 중앙은행의 긴급 대출이에요. 은행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할 때 한국은행이 급하게 빌려줄 수 있어요.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는 거죠. '돈의 역사' 5화에서 중앙은행이 하는 일 중 하나로 짚었던 게 바로 이거예요.

이 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안심하고 돈을 맡기고, 은행은 그 돈으로 대출을 하고, 경제가 돌아가요. 1화에서 이자는 시간의 값과 위험의 값이라고 했죠. 그 위험이라는 게 결국 못 돌려받을 수 있다는 불안이고요. 은행 시스템도 똑같아요. 금세공사의 보관증이든 오늘의 통장 잔액이든, 핵심은 이 숫자를 가져가면 진짜 돈으로 바꿔준다는 신뢰예요. 그 신뢰가 유지되면 시스템이 돌아가고, 무너지면 뱅크런이 일어나요.

그래서 지금은?

지금 내 통장에 찍힌 잔액도 이 사슬의 한 칸이에요. 내가 넣어둔 돈은 지급준비금 몫만 남고 대부분 누군가의 대출로 이미 나가 있어요. 그 사람이 쓴 돈은 또 다른 사람의 통장에 잔액으로 찍혀 있고요. 은행이 내 돈을 어딘가로 보냈다는 건 사고가 아니라, 그게 원래 은행이 하는 일이에요.

그래서 통장의 숫자는 금고 안에 쌓여 있는 지폐가 아니라 약속이에요. 한국의 지급준비율은 예금 종류에 따라 2~7%. 나머지는 지금 이 순간 누군가의 전세 보증금이 되고, 가게 인테리어 비용이 되고, 회사 월급으로 나가 있어요. 내 잔액 옆에는 그 사슬이 통째로 딸려 있는 셈이에요.

이게 조금 아슬아슬하게 들린다면 그 감각도 맞아요. 앞에서 본 두 안전장치가 그래서 필요한 거고요. 한 금융회사에 맡긴 돈이 원금과 이자를 합쳐 1억 원을 넘지 않게 나눠 두면, 그 선까지는 보호받아요.

오늘 해볼 만한 건 간단해요. 은행 앱을 열어 잔액을 보면서 이 숫자가 지금 어디에서 일하고 있을까 한 번 떠올려 보는 것, 그리고 돈이 한 회사에 몰려 있지는 않은지 확인해 보는 것. 이 두 가지만으로도 통장을 보는 눈이 달라져요.

다음 화에서는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상품, 예금과 적금을 들여다볼게요. 둘의 차이가 뭔지, 예금자보호는 정확히 어디까지인지, CMA 같은 건 또 뭔지. 바로 써먹을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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