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코인, 정부도 은행도 없는 돈

비트코인, 정부도 은행도 없는 돈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돈이 가능할까?

SeriesFeb 12, 20269 minutes

통장 잔고는 결국 은행 컴퓨터에 적힌 숫자예요. 그럼 그 은행이 무너지면 내 돈은 어떻게 될까요? 서기 2008년, 이 질문 앞에서 정체불명의 누군가가 정부도 은행도 필요 없는 돈을 만들겠다고 나섰어요. 그 실험이 비트코인이에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은행이 망하면 내 통장의 숫자는 어떻게 될까요

밑바닥이 깨진 거대한 저금통이 넘어져 있고, 펭귄이 텅 빈 속을 날개로 휘저어 본다

11화에서 본 것처럼 통장 잔고는 은행 컴퓨터 안에 적힌 숫자예요. 그 숫자가 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죠. 늘 거기 있는 거니까요.

그런데 서기 2008년 9월, 전 세계가 이 질문의 답을 아주 비싼 값에 확인했어요. 미국의 큰 은행이던 리먼 브라더스가 무너졌거든요. 158년을 버텨온 은행이 하루아침에 사라졌어요.

원인은 집값이었어요. 은행들이 갚을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까지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줬거든요. "집값은 어차피 계속 오를 테니 괜찮다"면서요. 그런데 집값이 떨어졌어요. 빌려준 돈을 돌려받지 못한 은행들이 줄줄이 쓰러졌죠.

각국 정부는 세금으로 은행을 살렸어요. "너무 커서 망하게 둘 수 없다"는 이유였죠. 사람들은 화가 났어요. "은행이 도박을 하다 사고를 쳤는데, 왜 우리 세금으로 구해주죠?"

1997년 한국에서도 그랬어요. 9화에서 본, 나라 금고의 달러가 바닥났던 그 시절이요. 그때 멀쩡해 보이던 은행 몇 곳이 문을 닫거나 다른 은행에 넘어갔고, 내 돈을 맡아주던 곳도 사라질 수 있다는 걸 그때 실감한 사람이 많았어요.

이 사건이 드러낸 건 이거였어요. 내 돈은 결국 은행 컴퓨터 속 숫자예요. 그 숫자를 지켜주는 건 은행과 정부고요. 그러니 보증인이 흔들리면 내 돈도 같이 흔들려요.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올린 논문

거대한 백지 뒤에 숨은 펭귄이 모서리를 잡고 얼굴만 빼꼼 내민 그림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그해 10월 31일, 인터넷의 한 이메일 모임에 A4 아홉 장짜리 논문이 올라왔어요. 요즘으로 치면 단톡방에 파일 하나를 툭 올린 거예요.

작성자 이름은 사토시 나카모토. 일본식 이름이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지금까지도 아무도 몰라요. 한 사람인지 여러 명인지조차요.

제목은 이랬어요. "비트코인 : P2P 전자 화폐 시스템".

P2P는 '개인 대 개인'이라는 뜻이에요. 은행이라는 중간 다리 없이 사람과 사람이 직접 주고받는다는 말이죠.

친구에게 송금 앱으로 5천 원을 보낼 때를 떠올려보세요. 화면만 보면 나와 친구 둘뿐이지만, 그 5천 원은 회사와 은행을 거쳐서 건너가요. 사토시는 그 중간 다리를 통째로 없애자고 한 거예요.

지금까지 돈은 늘 누군가를 믿어야 했어요. 2화의 동전은 왕을, 5화의 지폐는 중앙은행을, 통장 잔고는 은행을 믿어야 했죠. 사토시의 제안은 이거였어요. 그 믿음을 사람이 아니라 기술에 맡기자.

서기 2009년 1월 3일, 비트코인이 실제로 돌아가기 시작했어요. 맨 처음 만들어진 기록 안에는 그날 영국 신문의 1면 제목이 새겨져 있어요. "재무장관, 은행에 두 번째 구제금융 검토 중." 구제금융은 망하게 생긴 은행을 정부가 세금으로 살려주는 걸 말해요. 사토시는 자기가 왜 이걸 만들었는지를 맨 첫 기록에 못 박아둔 거예요.

은행 대신, 수만 대의 컴퓨터가 장부를 써요

블록 사슬의 빈 칸에 새 블록 하나를 들어 올려 끼워 넣는 펭귄 그림

비트코인의 뼈대는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이에요. 이름은 어렵지만 하는 일은 단순해요. 전 세계 수만 대의 컴퓨터가 똑같은 장부(거래를 적어두는 공책)를 동시에 적는 것이에요.

송금 앱으로 친구에게 10만 원을 보내면 화면 속 숫자가 바뀌죠. 그 순간 은행은 공책에 이렇게 적어요. "A 계좌에서 10만 원 빼기, B 계좌에 10만 원 넣기."

그런데 이 공책은 은행 혼자 가지고 있어요. 우리는 펼쳐볼 수도 없죠. 그래서 은행을 믿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요.

비트코인은 이 공책을 모두에게 나눠줬어요. 한 대를 몰래 고쳐도 나머지 수만 대가 "그거 틀렸는데요"라고 하니 소용이 없고요.

그런데 그 수만 대는, 남의 거래를 왜 공짜로 적어줄까요?

당연히 공짜가 아니에요. 공책의 다음 쪽을 쓸 자격을 두고 컴퓨터들이 경쟁해요. 아주 어려운 수학 문제를 가장 먼저 푼 컴퓨터가 그 쪽을 쓰고, 대가로 새 비트코인을 받아요. 이 일을 '채굴'이라고 불러요. 땅을 파서 금을 캐내듯, 컴퓨터를 돌려 캐낸다는 뜻이죠.

중요한 건, 비트코인이 세상에 나오는 길은 이것 하나뿐이라는 거예요. 누가 찍어내는 게 아니에요. 장부를 지켜준 대가로만 조금씩 풀려요. 게다가 이 보상은 약 4년마다 절반으로 줄어서 언젠가는 0이 돼요.

그래서 비트코인은 총 2,100만 개에서 딱 멈추도록 설계돼 있어요. 세상 사람이 80억 명쯤인데 2,100만 개니까, 다 같이 나누면 한 사람당 하나도 못 갖는 양이에요.

1화의 시험지에 비트코인을 대볼까요

기둥에 걸친 거대한 금괴 바를 짚고 훌쩍 뛰어넘는 펭귄 그림

1화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돈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었죠. 안 썩고, 나눌 수 있고, 아무나 못 구하고, 어디서나 통할 것.

비트코인을 여기에 대볼게요.

  • 잘 안 썩나요? - 지갑 속 천 원짜리는 몇 년 만지면 너덜너덜해지죠. 비트코인은 데이터라서 닳지도, 녹슬지도, 젖지도 않아요.

  • 잘게 나눌 수 있나요? - 1비트코인은 1억 조각까지 쪼개져요. 그 최소 단위 이름이 만든 사람에게서 딴 '사토시'고요.

  • 아무나 못 구하나요? - 2,100만 개가 전부고, 그마저도 컴퓨터를 한참 돌려야 겨우 얻어요.

앞의 세 칸은 가뿐히 통과예요. 마지막 칸, 어디서나 통하는가는 아직 시험 중이고요. 조개껍데기가 넘지 못했고 금이 넘었던 그 문턱을, 수천 년 만에 눈에 보이지도 않는 데이터 덩어리가 넘보고 있는 거죠. 그래서 비트코인을 '디지털 금'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다른 점은 딱 하나예요. 금은 손에 쥘 수 있었지만, 이건 아무도 쥘 수 없어요. 휴대폰 게임 속 게임 머니처럼요. 화면에는 분명히 있는데, 손바닥에는 아무것도 없죠.

피자 두 판이 값을 만들었어요

자기보다 큰 피자 한 판을 두 날개로 통째로 껴안은 펭귄 그림

서기 2010년 5월 22일, 미국의 프로그래머 라슬로 한예츠가 인터넷 게시판에 글을 올렸어요. "비트코인 1만 개 줄 테니 피자 두 판 시켜줄 사람?"

누군가 응했고, 진짜로 피자가 배달됐어요. 그때 1만 개의 값어치는 40달러 남짓, 우리 돈으로 5만 원쯤이었어요. 지금 배달앱으로 피자 두 판 시키는 값이랑 비슷하죠.

이게 비트코인으로 실제 물건을 산 최초의 거래예요. 그래서 해마다 5월 22일을 '비트코인 피자데이'라고 부르며 기념해요.

그 1만 개는 지금 시세로 1조 원 안팎이에요. 피자 두 판 값으로요. 그런데 정작 한예츠 본인은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해요. 아무도 쓰지 않던 그 숫자로 누군가 진짜 피자를 건네준 순간, 비트코인이 비로소 '값이 있는 것'이 됐으니까요.

1화의 기프티콘과 똑같아요. 휴대폰 속 그림 한 장도, 직원이 찍어주고 커피를 내주는 순간 진짜 값이 생기잖아요.

1화에서 한 이야기 그대로죠. 누군가 받아주기 시작하는 순간, 그때부터 돈이 돼요. 조개껍데기도, 5만 원권도, 비트코인도 똑같아요.

가장 큰 장점이 가장 큰 약점이에요

크게 기울어진 거대한 시소 한가운데 올라타 균형을 잡는 펭귄 그림

다만 피자 이야기에는 뒷면이 있어요. 값이 저렇게까지 뛰었다는 건, 그만큼 값이 심하게 출렁인다는 뜻이거든요.

이번 달 월세 50만 원을 비트코인으로 내기로 했다고 쳐볼게요. 그런데 월세 내는 날 그 값이 반토막 나면, 집주인이 실제로 받는 건 25만 원어치예요. 반대로 두 배로 뛰면 나는 100만 원을 낸 셈이고요.

이렇게 값이 매일 오르내리면 물건값을 매기는 기준으로 쓸 수가 없어요. 그래서 비트코인은 실제로는 '돈'보다 '투자 자산'처럼 쓰이고 있어요.

2,100만 개로 못 박아둔 설계도 마찬가지예요. 비트코인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요. "정부는 필요하면 돈을 더 찍어낼 수 있잖아요. 비트코인은 아무도 그럴 수가 없으니 오히려 더 믿을 만하죠."

그런데 8화에서 봤죠. 대공황에서 각국이 빠져나온 방법이 바로 돈을 못 늘리게 묶어둔 족쇄를 풀어버리는 것이었어요.

2020년 코로나 때 우리 통장에 들어온 재난지원금도 그 족쇄가 없어서 가능했던 일이에요. 돈의 양을 절대 못 늘린다는 건, 위기가 닥쳤을 때 손쓸 방법이 없다는 뜻이기도 해요. 비트코인의 가장 큰 장점이, 그대로 가장 큰 약점이기도 한 거예요.

숙제는 더 있어요. 그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느라 전 세계가 어마어마한 전기를 쓰고 있어요. 수만 대의 컴퓨터가 밤낮없이 돌아가니까요. 그리고 은행을 거치지 않는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범죄에 쓰이기도 해요.

그래서 지금은?

세워진 거대한 스마트폰 위에 걸터앉아 빈 화면을 내려다보는 펭귄 그림

이 실험은 이미 우리 곁에 있어요. 우리나라에서 가상자산 거래소에 가입해 실제로 거래까지 할 수 있는 계정이 1,100만 개가 넘거든요. 성인 네 명 중 한 명꼴이죠.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인터넷에 논문을 올린 지 20년도 안 돼서, 그 아이디어가 천만 명의 휴대폰 안에 들어와 있는 거예요.

그렇다고 비트코인이 5만 원권을 밀어낸 건 아니에요. 우리는 오늘도 점심값을 카드로 내고, 월급은 원화로 받죠. 비트코인이 정말로 바꾼 건 결제 수단이 아니라 질문이에요.

"돈에 정말 정부가 필요할까?"

지금까지 바뀐 건 늘 돈의 모양이 아니라, 그 약속을 누가 보증하느냐였어요. 옆집 사람에서 왕으로, 나라의 관청에서 중앙은행으로요. 비트코인은 그 자리에 사상 처음으로 사람이 아닌 것을 앉혔어요. 전 세계 수만 대의 컴퓨터요.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라는 본질은 여기서도 그대로죠. 비트코인은 그 약속을 사람 대신 기계에 맡겨보자는, 인류의 가장 최근 실험이에요.

그리고 이 실험은 각국 중앙은행을 긴장시켰어요. "민간이 만든 디지털 돈이 퍼지면, 우리가 돈을 관리할 수 없게 되는 거 아닌가?" 그래서 중앙은행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해요.

다음 화는 이 시리즈의 마지막 이야기예요. 중앙은행이 직접 만드는 디지털 화폐, 그리고 조개껍데기에서 여기까지 수천 년이 지나고 결국 남은 게 뭔지 이야기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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