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폐 위쪽엔 '한국은행' 네 글자가 찍혀 있어요. 이 종이는 왜 아무나 못 찍고, 한국은행만 찍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이 350년 전 스웨덴에 있어요. 유럽 최초의 지폐가 3년 만에 무너졌고, 그 실패에서 '돈 찍는 곳은 딱 하나만 두자'는 결론이 나왔거든요. 어려운 말은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장 보러 가는데 수레가 필요했어요

장을 보러 가는데 지갑이 아니라 수레를 끌고 나가야 한다면 어떨까요?
지금 우리는 편의점에서 카드 한 장이면 계산이 끝나죠. 그 자리에 구리 판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이 있었어요.
지금으로부터 400년쯤 전의 스웨덴 사람들이에요. 이 나라 돈은 구리로 만든 커다란 판이었거든요. 서기 1644년에 만든 가장 큰 판은 무게가 19.7kg, 쌀 20kg 한 포대만 했어요. 크기는 30×70cm로 대형 여행 가방만 했고요. 이 판은 지금도 '역사상 가장 무거운 유통 화폐'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어요.
왜 이런 걸 만들었을까요? 스웨덴은 오랜 전쟁으로 금과 은이 바닥나 있었어요. 대신 구리는 아주 풍부했고요. 구리는 금이나 은보다 훨씬 싼 금속이라, 같은 값어치를 담으려면 크고 무거워질 수밖에 없었죠. 3화의 쓰촨 철전과 똑같은 사정이에요.
제일 큰 판은 너무 불편해서 몇 년 만에 사라졌다고 해요. 그래도 그 뒤로 한참 동안, 몇 kg짜리 구리 판이 스웨덴 사람들의 일상 화폐였어요.
4화에서 영국 금세공사들의 보관증이 지폐의 씨앗이 됐다고 했죠. 그건 어디까지나 민간이 만든 거였어요. 나라의 허가를 받고 찍은 유럽 최초의 지폐는, 영국도 프랑스도 아닌 이 무거운 나라에서 나와요.
어디서 본 이야기 같지 않나요?

3화의 중국 쓰촨과 똑같은 이야기예요. 싼 금속으로 돈을 만들다 보니 무거워졌고, 무거워지니 종이가 등장해요. 지구 반대편에서 600년 차이를 두고 같은 일이 벌어진 거죠.
1화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돈의 특징들을 구리 판에 하나씩 대보면, 어디가 부러졌는지 보여요.
잘 안 썩는다 - 통과. 금속이니까요.
아무나 못 구한다 - 아슬아슬 통과. 스웨덴엔 구리가 흔한 편이었고, 그래서 판이 그렇게까지 커진 거예요.
잘게 나눌 수 있다 - 완전 낙제. 20kg짜리 판을 반으로 쪼개서 주머니에 넣을 수는 없잖아요.
잘게 나뉘지 않는 돈이 왜 그렇게 곤란하냐면요. 선물로 받은 5만원짜리 상품권을 들고 편의점에 들어가 껌 하나를 사려던 적 있나요? 못 쓰는 건 아닌데 어쩐지 곤란하죠. 잘게 나뉘지 않는 돈은 그 곤란함을 매일 겪게 만들어요.
특징 하나라도 빠지면 사람들은 결국 다른 돈을 찾아요. 그 다른 돈을 만든 사람이, 스웨덴에 있었어요.
유럽 최초의 지폐를 만든 남자의 최후

서기 1656년, 요한 팜스트루크라는 사람이 국왕의 허가를 받았어요. 그리고 다음 해 스톡홀름스 방코라는 은행의 문을 열었죠. 서기 1661년, 이 은행이 무거운 구리 판 대신 종이돈을 발행해요. 이름은 '크레디티브세들라르', 우리말로 옮기면 '신용 쪽지'쯤 되는 이름이에요.
반응은 폭발적이었어요. 당연하죠. 수레에 싣고 다니던 구리 판이 종이 한 장으로 바뀌었으니까요.
그런데 팜스트루크는 금고에 있는 구리보다 훨씬 많은 종이를 찍어냈어요. 4화의 금세공사가 한 일 그대로죠. 금화 1,000개에 보관증 3,000개.
그러다 소문이 돌자 사람들이 은행 앞에 몰려와 구리로 바꿔달라고 했어요. 4화에서 본 뱅크런이죠. 은행에는 내줄 구리가 없었어요. 지폐를 찍은 지 3년 만에 은행은 문을 닫았고, 서기 1668년 팜스트루크는 사형 선고를 받아요.
유럽 최초로 지폐를 만든 사람의 최후가 사형 선고라니, 좀 서늘하죠. 다행히 감형돼 감옥살이로 끝났어요. 그는 1670년에 풀려나 이듬해 세상을 떠났고요.
그가 벌을 받은 건 종이돈을 만들어서가 아니라, 있지도 않은 구리를 있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찍는 사람을 딱 하나로 정했어요

결론은 3화의 중국과 같았어요. 너무 많이 찍으면 무너진다. 그런데 유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갔어요. "이제 종이돈은 그만"이 아니라, "찍는 사람을 딱 하나로 정하고, 그 하나를 온 나라가 감시하자"로요.
같은 해, 스웨덴 의회는 새 은행을 세웠어요. 이름은 릭스방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이고, 지금도 스웨덴에서 돈을 찍는 곳이에요.
'중앙은행'이라는 말이 여기서 처음 나왔죠. 우리가 아는 은행이 사람들의 돈을 받아 굴리는 곳이라면, 중앙은행은 은행들의 은행이에요. 하는 일은 크게 셋이고요.
그 나라에서 돈을 찍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은행이에요.
다른 은행이 휘청거리면 급하게 돈을 빌려줘요.
세상에 돌아다니는 돈의 양을 조절해요.
우리나라에서는 한국은행이 그 자리예요. 2화의 500원, 3화의 만 원에서 봤던 그 '한국은행' 글자가 바로 스톡홀름에서 나온 답인 거죠. 아무나 찍지 못하게, 딱 한 곳만 찍게 하자.
그리고 이 발명품은 곧 바다 건너 영국에서, 훨씬 큰 판으로 다시 만들어져요.
나라의 빚이 곧 돈이 됐어요

영국에서도 서기 1694년, 영란은행이 세워졌어요. 계기는 역시 전쟁이었어요.
프랑스와 싸우던 영국 정부는 돈이 급했어요. 세금을 더 걷자니 반발이 무서웠고요. 그래서 상인들에게 이런 제안을 해요. 돈을 모아 정부에 빌려주면, 그 대가로 나라 안에서 지폐를 찍을 수 있는 권리를 주겠다고요.
빌린 돈은 120만 파운드, 이자는 연 8%였어요. 모집을 시작하자 12일 만에 다 찼고요.
그렇게 태어난 영란은행의 지폐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었어요.
"I promise to pay the bearer on demand the sum of…"
(이 증서를 가져오는 분께, 요청하시면 얼마를 지불할 것을 약속합니다)
놀랍게도 이 문구는 지금도 영국 파운드 지폐에 그대로 인쇄돼 있어요. 세계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돈인데, 그 돈을 떠받치고 있는 건 결국 '약속합니다' 한 마디예요.
3화 교자에 적혀 있던 '가져오면 바꿔줄게', 4화 금세공사의 보관증과 똑같은 약속이죠.
그리고 이 거래 방식은 앞으로 계속 나와요. 나라가 급하면 돈을 빌리고, 그 빚이 곧 돈이 된다. 뉴스에 나오는 '국채'가 바로 나라가 써준 차용증이에요. 그 차용증을 밑천 삼아 돈을 찍는 방식이 여기서 자리를 잡았고, 이 습관은 200년쯤 뒤에 아주 큰 사고를 치게 돼요.
그래서 지금은?

1화에서 돈은 약속이라고 했죠. 이번에도 바뀐 건 약속하는 사람이에요. 4화 금세공사가 앉아 있던 보증인의 자리를 중앙은행이 물려받았고, 팜스트루크의 은행이 못 지킨 약속은 온 나라가 감시하는 약속이 됐어요. 우리 지갑 속 지폐도, 통장에 찍힌 숫자도 그 약속 위에 놓여 있고요.
뉴스에 나오는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올렸다"는 말이 바로 아까 말한 세 번째 일이에요. 세상에 돌아다니는 돈의 양을 조절하는 거요.
그리고 그 조절은 멀리 있지 않아요. 금리가 오르면 그 달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대출 이자가 늘어요. 이자로 나가는 돈이 늘어난 만큼,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는 것도 줄어들고요. 1668년 스웨덴 사람들이 "누가 돈을 찍게 할까"를 두고 내린 결론이, 350년 넘게 지난 오늘 우리 통장까지 이어져 있는 거예요.
다만 이 시절 사람들 마음 한구석엔 불안이 남아 있었어요. 중앙은행이 찍었다고 해도, 종이는 결국 종이니까요. 그 약속이 진짜라는 걸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을까요?
다음 화에서는 그 불안을 달래려고 사람들이 종이돈 뒤에 진짜를 하나 세워두는 이야기를 할게요. 바로 금이에요.
돈의 역사
조개껍데기가 스마트폰 속 숫자가 되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