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종이돈

중국에서 시작된 세계 최초의 종이돈

왜 유럽이 아니라 중국이 먼저였을까?

SeriesJan 27, 20268 minutes

지갑 속 만 원짜리는 원가로 따지면 몇백 원짜리 종이예요. 이 종이가 돈이 되기 시작한 건 1,000년 전 중국에서였어요. 세계에서 처음으로 종이돈을 만든 나라이자, 종이돈이 처음으로 휴지 조각이 되는 것까지 지켜본 나라죠. 종이는 어쩌다 돈이 됐고, 또 어쩌다 도로 종이가 됐을까요? 복잡한 건 빼고 천천히 따라가 볼게요.

비단 한 필 사는 데 동전 50kg

펭귄이 자기 키보다 큰 엽전 꾸러미를 어깨로 밀고 있다

지금 주머니나 지갑에 동전이 몇 개 들어 있는지 세어보세요. 열 개만 넘어가도 짤랑거리는 게 거슬리죠. 그런데 편의점에서 만 원어치를 전부 100원짜리로 계산해야 한다면 어떨까요. 세계 최초의 종이돈은 바로 그 짜증 때문에 만들어졌어요.

만든 나라는 중국이었어요. 유럽에서 첫 종이돈이 나오기 600년도 더 전이죠. 왜 하필 중국이었을까요? 종이부터가 중국의 발명품이었거든요. 찍어내는 인쇄 기술도 중국이 한참 앞서 있었고요. 유럽엔 아직 종이 자체가 없던 시절이에요.

그런데 중국의 돈은 2화의 금화·은화와는 달랐어요. 금·은이 귀한 땅이라, 시장에서 쓰는 돈은 값이 작은 구리 동전이었거든요. 가운데 네모난 구멍이 뚫려 있어서 끈으로 꿰어 들고 다녔고, 1,000개를 한 줄로 꿴 걸 '관(貫)'이라고 불렀어요.

문제는 쓰촨 지역이었어요. 이 동네는 구리마저 부족해서 철로 동전을 만들었거든요. 철은 구리보다 훨씬 싸요. 그런데 값싼 쇠붙이에 큰 값을 새겨두면 똑같이 흉내 낸 가짜가 쏟아져요. 그러니 싼 철로 같은 값어치를 담으려면 동전을 크고 무겁게 만들 수밖에 없었어요.

  • 철 동전 1,000개 = 약 12.5kg (물 2리터짜리 여섯 병 무게)

  • 비단 한 필(옷감 한 두루마리) 값 = 철 동전 45~50kg (쌀 20kg 포대 두 개 반)

비단 한 필 사겠다고 자기 몸무게만 한 동전을 지고 가야 했던 거예요. 수레 없이는 장도 못 보는 상황이었죠. 지금 우리는 그 무게를 카드 한 장, 아니면 손에 쥔 폰 하나에 담고 다녀요. 이 차이가 어디서 왔는지가 오늘 이야기예요.

날아다니는 돈

펭귄이 연처럼 날아오른 커다란 종이의 줄을 붙잡고 버티고 있다

요새는 친구에게 5만 원을 보낼 때 폰으로 이체하잖아요. 돈은 은행 금고에 그대로 있고, 움직이는 건 화면 속 숫자뿐이죠. 1,200년 전 중국 상인들이 처음 떠올린 것도 정확히 이 생각이었어요.

무대는 당나라였어요. 상인들이 꾀를 냈죠. 무거운 동전을 짊어지고 다니는 대신, 동전을 맡기고 받은 보관증을 주고받기 시작한 거예요. 이걸 비전(飛錢)이라고 불렀어요. '날아다니는 돈'이라는 뜻이에요. 동전은 창고에 가만히 있는데 값어치만 멀리 날아간다는 거죠.

방식은 이랬어요.

  • 상인이 수도의 큰 상점에 동전을 맡겨요

  • 상점이 보관증을 한 장 써줘요

  • 상인이 다른 지역에서 그 보관증을 내밀고 동전을 찾아요

기록을 보면 서기 804년 무렵에는 이미 상인들이 이걸 쓰고 있었어요. 나라에서는 처음엔 낯선 방식을 못마땅해하며 몇 번 금지도 했어요. 그러다 서기 812년엔 마음을 바꿔 공식적으로 인정해요. 써 보니 나라에도 이득이었거든요. 구리가 모자라 동전도 못 찍던 참에, 동전 없이 거래가 됐으니까요.

다만 비전으로 물건을 살 수는 없었어요. 어디까지나 동전을 찾기 위한 보관증이었거든요. 돈 그 자체라기보다는, 돈을 옮기는 방법에 가까웠어요. 돈 자체가 종이가 되기까지는, 한 걸음이 더 남아 있었죠.

상인이 만들고, 나라가 가져간 종이

빈 종이 한가운데를 거대한 왕관이 내리누르고, 펭귄이 왕관을 밀어 자리잡게 한다

진짜 종이돈이 등장한 건 그로부터 200년쯤 뒤, 송나라 때예요. 무대는 또 쓰촨이었어요. 그 무거운 철 동전에 지친 상인들이, 아예 보관증끼리 주고받기 시작한 거예요. 동전으로 바꾸지 않고, 보관증 그대로 물건값을 치른 거죠. 이걸 교자(交子)라고 불러요.

교자에 적힌 건 딱 한 줄짜리 약속이었어요. "이 종이를 가져오면 동전으로 바꿔줄게."

사실 우리도 교자를 쓰고 있어요. 백화점 상품권이나 1화에서 말한 카페 기프티콘이 딱 그거예요. '이걸 가져오면 그만큼 내줄게'라는 약속이 적힌 종이나 화면이잖아요. 1,000년 전 쓰촨 상인들이 발명한 게 바로 이거예요.

처음의 교자는 민간 상인들이 각자 찍어낸 거였어요. 그러다 사고가 터졌죠. 일부 상인이 장사를 말아먹고 파산해버린 거예요. 방금 말한 기프티콘으로 치면, 가게가 문을 닫아버린 셈이죠. 종이를 들고 가도 바꿔줄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서기 1023년, 송나라 정부가 직접 나섰어요. 개인이 찍는 교자를 금지하고, 쓰촨에 종이돈 담당 관청을 세웠어요. 다음 해부터는 나라 이름으로 종이돈을 찍기 시작했고요. 이게 세계 최초의 정부 발행 지폐예요.

효과는 확실했어요. 12kg짜리 동전 꾸러미가 종이 한 장이 됐으니까요. 먼 거리 거래가 쉬워지고, 동전 세는 시간도 사라졌어요. 송나라 상업이 크게 번창한 데에는 이 종이의 몫이 컸어요.

여기서 달라진 게 뭘까요? 종이는 그대로예요. 적힌 약속도 그대로고요. 바뀐 건 약속하는 사람이에요. 1화에서는 옆집 사람끼리 서로 믿었고, 2화에서는 왕이 보증했죠. 이제 나라의 관청이 그 자리에 섰어요. 돈의 역사는 사실, 이 보증인이 계속 바뀌어온 역사예요.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는 건 한국은행이에요. 2화에서 본 500원짜리의 '한국은행' 글자가 만 원짜리에도 똑같이 찍혀 있죠. 보증인의 자리가 1,000년 넘게 이어져 온 거예요. 그리고 이 신기한 종이돈 소문은 곧 먼 나라 여행자의 귀에까지 닿아요.

"종이가 돈이라니, 허풍이 심하네"

펭귄이 거대한 책의 펼쳐진 페이지 사이에 앉아 위를 올려다본다

서기 1275년, 이탈리아 상인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왔어요. 그사이 중국의 주인은 송나라에서, 몽골이 세운 원나라로 바뀌어 있었죠. 종이돈은 나라가 바뀌어도 살아남아 더 널리 쓰이고 있었고요. 마르코 폴로는 이게 어찌나 신기했는지 책 한 챕터를 통째로 종이돈 얘기에 썼어요. 뽕나무 껍질로 만든 종이 한 장이 나라 어디서나 금화처럼 통한다고요.

유럽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했어요. 저 사람 허풍이 심하다고요. 사실 그의 책에 적힌 다른 이야기들도 대체로 그렇게 취급받았어요. 하지만 종이돈 이야기만큼은 사실이었죠.

이 표정, 우리도 본 적 있어요. "저는 지갑을 아예 안 들고 다녀요"라는 말에 돌아오는 어른들의 그 얼굴이요. 새로운 돈은 언제나 처음엔 허풍처럼 들려요.

그런데 마르코 폴로가 감탄하던 바로 그 시기에, 원나라의 종이돈은 이미 안쪽부터 무너지고 있었어요.

브레이크가 통째로 풀렸어요

펭귄이 종이를 끝없이 쏟아내는 인쇄기 손잡이에 매달려 있다

왜 무너졌을까요? 답은 1화에 있어요. 끝까지 살아남은 돈들의 공통점 중 하나가 아무나 못 구한다는 거였죠. 금도 은도 땅을 파야 겨우 나오니까, 왕이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한계가 있었어요. 2화에서 왕들이 동전 속 은을 몰래 덜어냈을 때도, 그건 브레이크를 살짝 느슨하게 푸는 정도였고요. '아무나 못 구한다'는 조건은, 사실 돈을 지켜주는 브레이크였던 거예요.

그런데 종이는요? 인쇄기와 종이만 있으면 얼마든지 찍을 수 있어요. 편리함을 얻은 대가로 그 브레이크가 통째로 풀려버린 거죠.

원나라는 그 유혹을 이기지 못했어요. 전쟁 비용, 관리들 월급, 각종 지출. 돈이 부족할 때마다 더 찍었어요. 결과는 뻔했죠. 종이돈이 넘쳐나니 값어치가 떨어졌어요. 어제 쌀 한 가마니 살 수 있던 돈으로 오늘은 반 가마니밖에 못 사게 된 거예요. 2화 로마에서 봤던 인플레이션이에요. 로마는 그래도 은을 조금씩 덜어내는 정도였지만, 종이는 브레이크가 아예 없으니 속도가 비교가 안 됐죠.

원나라 말기에는 값어치가 너무 떨어져서 백성들이 아예 받기를 거부했어요. 1화에서 사람들이 안 받아주는 순간 금도 그냥 돌덩이가 된다고 했죠. 그 일이 종이돈에 실제로 벌어진 거예요. 뒤이은 명나라도 새 종이돈을 찍었지만 마찬가지였어요. 서기 1400년대 초에는 종이돈의 값이 300분의 1로 떨어졌다고 해요. 종이에 1,000원이라고 적혀 있으면 3원어치로만 받아줬다는 뜻이에요.

그리고 서기 1455년 이후로는 종이돈이 돌아다녔다는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아요. 400년 넘게 이어온 종이돈 실험을 중국은 스스로 접고, 무겁지만 확실한 은덩이로 돌아갔어요. 저울로 무게를 재던 그 시절로 되돌아간 거죠.

그래서 지금은?

펭귄이 자기보다 큰 종이 등불을 두 팔로 껴안고 있다

교자의 탄생도, 원나라의 몰락도 결국 1화의 그 한 문장으로 모여요. 돈은 물건이 아니라, 약속이에요. 종이돈만큼 이 말이 잘 보이는 데가 없죠.

그런데 이상한 게 하나 남아요. 교자에는 '가져오면 동전으로 바꿔줄게'라는 약속이라도 적혀 있었어요. 지금 지갑 속 만 원짜리에는 그런 말이 없어요. 은행에 가져가도 바꿔줄 게 없고요. 바꿔줄 것도 없는 종이를, 우리는 대체 뭘 믿고 받는 걸까요? 이 수수께끼는 시리즈 뒷부분에서 풀 거예요.

그전에 먼저 가볼 곳이 있어요. 돈의 약속은 나라만 할 수 있는 걸까요? 다음 화에서는 유럽으로 건너가요. 반지 만들던 장인들의 금고에서 은행이 시작된 이야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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