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은행이 예대마진으로 돈을 번다는 걸 알았어요.
예금자에게 2% 주고, 대출자에게 5% 받고, 그 차이 3%가 은행의 수익이라고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해볼 게 있어요.
우리가 은행에 1,000만 원을 맡기면, 은행은 그 돈을 그대로 금고에 보관하고 있을까요?
아니에요. 만약 그랬다면, 은행은 예대마진도 벌 수 없었을 거예요. 은행은 우리가 맡긴 돈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에게 빌려줘요. 그리고 이 과정에서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다 갖고 있지 않아도 된다"
다시 금세공사 이야기로 돌아갈게요.
17세기 금세공사가 발견한 핵심은 이거였어요. "100명이 금을 맡겼는데, 동시에 찾으러 오는 건 기껏해야 10명이다." 그래서 금의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빌려줬죠.
현대 은행도 똑같은 원리로 작동해요. 은행은 예금자의 돈을 전부 보관하지 않아요. 법으로 정해진 일정 비율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대출해 줘요.
이 "남겨두는 비율"을 지급준비율이라고 해요. "예금자가 돈을 찾으러 왔을 때 지급할 수 있도록 준비해두는 비율"이라는 뜻이에요. 한국의 경우 예금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요구불예금(자유롭게 입출금할 수 있는 예금)은 7%, 정기예금·정기적금은 2%예요. 즉, 은행은 맡긴 돈의 93~98%를 대출이나 투자에 활용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대출 과정이 반복되면,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1,000만 원이 1억 원이 되는 과정
이해하기 쉽도록 지급준비율을 10%로 가정하고, 아주 단순한 예로 따라가 볼게요.
1단계. 민수가 A은행에 1,000만 원을 예금해요. → A은행은 100만 원(10%)을 지급준비금으로 남기고, 900만 원을 지영에게 대출해요.
여기서 잠깐 멈춰 볼게요. 민수의 통장에는 여전히 1,000만 원이 찍혀 있어요. 민수는 언제든 자기 돈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동시에 지영도 900만 원을 손에 쥐었어요.
경제 전체로 보면, 원래 1,000만 원이었던 돈이 1,900만 원처럼 기능하고 있는 거예요.
2단계. 지영은 이 900만 원으로 가구를 사요. 가구점 사장님은 받은 900만 원을 B은행에 입금해요. → B은행은 90만 원을 남기고, 810만 원을 준호에게 대출해요.
3단계. 준호는 810만 원으로 노트북을 사요. 그 판매 대금이 C은행으로 흘러가요. → C은행은 81만 원을 남기고, 729만 원을 대출해요.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어떻게 될까요?
1,000 + 900 + 810 + 729 + 656 + …
이 숫자를 끝까지 더하면, 이론적으로 최대 1억 원에 도달해요. (1,000만 원 ÷ 지급준비율 10% = 1억 원)
민수가 처음 맡긴 1,000만 원 하나가, 은행 시스템을 돌고 돌면서 1억 원의 예금을 만들어 낸 거예요. 물리적으로 지폐가 늘어난 건 아닌데, 통장에 찍힌 숫자로 보면 돈이 늘어났어요.
이것이 바로 신용창조예요. 은행 시스템이 대출과 예금을 반복하면서, 원래 있던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을 경제 안에 만들어내는 현상이에요.
다만, 이것은 이론적 최대치예요. 현실에서는 대출받은 사람이 전액을 은행에 다시 입금하지 않을 수도 있고, 현금으로 보유하는 부분도 있기 때문에, 실제 신용창조 규모는 이보다 작아요.
왜 이게 가능할까?
신용창조라는 말이 거창하지만, 원리는 간단해요. 핵심은 "은행이 예금의 전부를 보관하지 않아도 된다"는 데 있어요.
100명이 각각 1,000만 원을 맡겼다고 해볼게요. 총 100억 원이죠. 하지만 오늘 돈을 찾으러 오는 사람은 기껏해야 5~10명이에요. 그러면 은행은 100억 원 전부를 금고에 넣어둘 필요가 없어요. 일부만 남겨두고 나머지를 대출해도,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그리고 대출받은 사람이 그 돈을 쓰면, 그 돈은 다른 사람의 통장으로 들어가고, 그 은행은 또 대출을 해주고… 이렇게 돈이 돌고 돌면서, 처음보다 훨씬 많은 "통장 속 돈"이 만들어지는 거예요.
돈의 역사 4화에서 금세공사가 했던 것과 본질적으로 같아요. 금세공사도 맡긴 금보다 더 많은 보관증을 발행했거든요. 현대 은행은 맡긴 돈보다 더 많은 "통장 잔액"을 만들어내요.
신용창조가 없다면?
"없는 돈을 만들어내는 건 위험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어요.
하지만 신용창조가 없는 세상을 한번 상상해 보세요.
민수가 1,000만 원을 맡기면, 은행은 딱 그 1,00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요. 경제에 돈이 충분히 돌지 않아요. 기업은 공장을 짓고 싶어도 대출을 받기 어렵고, 사람들은 집을 사고 싶어도 돈을 빌리기 어려워요.
신용창조 덕분에 경제에 충분한 돈이 돌 수 있어요. 기업은 투자 자금을 빌리고, 사람들은 필요한 곳에 돈을 쓸 수 있고, 경제는 성장해요. 중앙은행이 실제로 찍어내는 돈보다 훨씬 많은 돈이 경제 안에서 돌아가는 것. 이것이 현대 경제가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 중 하나예요.
물론 반대 방향의 위험도 있어요. 신용창조가 과도하게 이루어지면 경제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자산 가격이 급등하거나 물가가 오를 수 있어요. 그래서 중앙은행은 지급준비율이나 기준금리 같은 도구로 신용창조의 규모를 조절해요. 이 이야기는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룰 거예요.
만약 모두가 동시에 찾으러 오면?
신용창조의 전제를 다시 볼게요.
"모든 예금자가 동시에 돈을 찾으러 오지 않는다."
이게 지켜지면 아무 문제가 없어요. 하지만 이 전제가 무너지면?
어느 날 뉴스에서 "○○은행이 위험하다"는 소문이 퍼져요. 불안해진 사람들이 한꺼번에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찾으려 해요. 하지만 은행에는 전체 예금의 일부만 남아 있어요. 나머지는 이미 대출로 나가 있으니까, 모든 사람에게 돈을 돌려줄 수 없어요.
이것이 바로 뱅크런(Bank Run)이에요.
뱅크런이 특히 위험한 이유는, 소문만으로도 시작될 수 있다는 거예요. 실제로 은행이 건전하더라도, "위험하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달려가면 정말로 은행이 지급 불능 상태에 빠질 수 있어요. 그리고 한 은행에서 시작된 불안은 다른 은행으로 번질 수도 있고요.
안전장치 : 예금자보호와 중앙은행
그래서 현대 금융 시스템에는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한 안전장치가 마련되어 있어요.
첫째, 예금자보호제도예요. 한국에서는 예금보험공사가 1인당 1억원까지(2025년 9월 5,000만원에서 1억으로 상향) 예금을 보호해줘요. 은행이 망하더라도, 1억원까지는 돌려받을 수 있어요. 이 제도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굳이 서둘러서 돈을 찾지 않아도 된다"는 심리적 안전망이 돼요. 뱅크런을 사전에 막는 장치인 셈이죠.
둘째, 중앙은행의 긴급 대출이에요. 은행이 일시적으로 돈이 부족할 때, 중앙은행(한국은행)이 긴급으로 돈을 빌려줄 수 있어요. 중앙은행이 "최후의 대부자" 역할을 하는 거예요. 돈의 역사 5화에서 영란은행이 이 역할을 처음 맡았다고 했죠? 그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요.
이 안전장치들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행에 돈을 맡기고, 은행은 그 돈으로 대출을 하고, 경제가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결국 은행 시스템은 "신뢰" 위에 서 있다
1화에서 이자의 본질은 "갚을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대가"라고 했어요. 은행 시스템도 마찬가지예요.
"예금자가 동시에 찾으러 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 그리고 "설령 문제가 생겨도 예금자보호와 중앙은행이 있다"는 신뢰.
이 전제와 신뢰 위에서 신용창조가 작동하고, 경제에 돈이 돌아요.
돈의 역사에서 봤듯이, 금세공사의 보관증도, 은행의 예금 통장도, 핵심은 같아요.
"이 숫자를 가져가면 진짜 돈으로 바꿔줄 수 있다"는 신뢰. 그 신뢰가 유지되면 시스템이 돌아가고, 무너지면 뱅크런이 일어나요.
이번 화 정리
- 은행은 예금의 일부(지급준비율: 한국은 예금 종류에 따라 2~7%)만 남기고 나머지를 대출
- 신용창조 : 대출과 예금이 반복되면서 원래보다 훨씬 많은 돈이 경제에 만들어지는 현상 (이론적 최대치이며, 현실에서는 이보다 작음)
- 신용창조 덕분에 경제에 충분한 돈이 돌 수 있지만, 과도하면 자산 버블이나 인플레이션 위험도 있음
- 뱅크런 : 예금자가 한꺼번에 돈을 찾으러 오면, 은행은 모든 돈을 돌려줄 수 없음
- 안전장치 : 예금자보호제도(1인당 1억원), 중앙은행의 최후의 대부자 역할
- 은행 시스템은 "신뢰" 위에 서 있다
다음 화에서는 우리가 매일 쓰는 금융 상품, 예금과 적금에 대해 알아볼 거예요. 둘의 차이가 뭔지, 예금자보호는 정확히 어디까지 되는지, CMA 같은 상품은 뭔지, 실생활에 바로 쓸 수 있는 이야기가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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